정치/사회

[66회] 김대중과 용호상박전

2019.04.30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가장 위기를 맞고 타격을 입은 것은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였다. 


‘정치도박’으로 3선개헌까지 강행하면서 터를 닦았다. 그런데 돌연변수가 나타났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였다.


신민당은 오랜 침체에서 깨어나 ‘40대 기수론’이 등장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격돌 끝에 김대중이 다크호스로 등장하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유진산 등 수월한 후보를 만들고자 했으나 야당 대의원들은 치열한 민주적 경선 끝에 연부역강한 김대중을 후보로 선출했다.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지명된 김대중은 “군정종식과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며, 패배한 김영삼은 “나와 같은 40대 동지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요, 바로 나의 승리”라고 하면서 대통령선거에서 협력을 다짐했다.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이날 전당대회의 결과는 야당의 깨끗한 경선과 함께 김대중ㆍ김영삼이라는 참신한 정치지도자를 배출한 의미 깊은 대회로 기록되었다.


신민당이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되는 제7대 대통령 선거전에 김대중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운동에 나선 데 반해 공화당은 비교적 차분한 자세로 일선조직에 열중하였다. 이미 3선개헌을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후보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후보지명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지명대회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3월 17일 지명대회를 가진 공화당은 박정희 총재를 또 다시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했다.


선거전은 당연히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공화당은 막강한 조직과 풍부한 자금으로 선거전에 나서고, 신민당은 김대중 후보의 다양하고 참신한 정책과 전국적인 유세를 통해 이에 맞섰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벽보.


김대중은 10월 16일 첫 기자회견에서 ① 향토예비군 폐지 ② 대통령 3선조항 환원의 개헌 ③ 대중경제 구현을 위한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④ 미ㆍ일ㆍ중ㆍ소 등 4대국에 의한 전쟁억제 요구 등을 당면정책으로 제시했다.


4ㆍ27대선은 과거 어느 선거에 비해 여야 간의 정책대결로 진행되었다. 그것도 야당후보의 리드에 의한 정책대결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김대중은 지방도시의 유세를 통해 ① 대통령의 재산공개 ② 남북간의 서신교류ㆍ기자교환 및 체육인 접촉 ③ 지식인ㆍ문화인 및 언론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④ 제2의 한일회담 및 주월국군 철수 ⑤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 연령 인하 ⑥ 반공법 제4조의 목적범 적용에 국한하는 개정작업 ⑦ 정부기관 일부의 대전 이전 ⑧ 전매사업의 공영화 내지 민영화 실현 등 많은 정책을 집권공약으로 내걸었다. 모두 155개에 달하는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여 정책대결을 리드했다. 


박정희도 10개 부문에 걸쳐 56개 항목의 정책을 제시했다. 정치관련 공약에서 ①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한 발전적 민주정치의 구현 ② 야당협조로 생산적 정치윤리의 구현 ③ 민원행정 간소화 ④ 지방재정 자립도를 높여 단계적 지방자치제 실시를 제시하고, 경제정책에서 세제개혁 및 금융제도의 개선, 국토개발계획을 다짐했다. 두 진영의 정책대결에 있어서는 김 후보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공약을 둘러싸고 쌍방 간에 쟁점이 빚어지기도 했다. 쟁점은 주로 ①안보논쟁 ②통일문제와 남북교류 ③장기집권 시비 ④ 부정부패의 척결 ⑤ 향토예비군과 교련폐지 문제 ⑥ 경제정책의 시비 등에 집중되었다. 


김 후보의 예비군 폐지 주장에 따른 대안의 제시는 일단 주춤해졌으나 정부 여당의 안보논쟁의 확산으로 정국에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유세의 대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졌던 두 후보의 유세전이었다. 


막판 열세에 몰린 박정희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김대중은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단언하여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유세.


선거운동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공화당 측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실이다.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은 “신라 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지역감정을 촉발시켰다. 이후 정권차원의 호남차별이 가시화되고, 지역갈등이 심화되었다. 야당탄압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김포ㆍ강화의 김대중 후보 차량 총격사건을 비롯, 그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의 자택이 원인 모를 화재를 당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부 여당은 ‘조작극’이라고 잡아 떼고, 경찰은 김 후보 자택의 화재는 “김대중의 15세 된 조카인 김홍준 군의 단독범행”이고, 정 선거대책본부장 집의 화재는 고양이를 실화점으로 밝혀 많은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투표 당일에도 여러 가지 관권 개입으로 시비가 일었다. 심지어 김대중 후보가 투표한 마포구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는 투표구 선관위원장이 사인(私印) 대신 직인을 찍어 1,690표가 무효가 되기도 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후보가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4만 6,928표를 앞질러 당선이 결정되었다. 


부정선거는 이번 선거에서도 어김없이 자행되었다. 후일 박 정권에서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선자금으로 700억 원 가량이 살포되었다고 한다. 1971년 국가예산이 약 5,200억 원 규모였던 점을 감안하면 총예산의 1/7 가량을 선거에 쏟아 부은 것이다. 


4ㆍ27선거의 특징적인 현상은 ① 지방색의 노출 ② 표의 동서현상 ③ 여촌야도의 부활 ④ 군소정당의 철저한 몰락이었다. 이 선거에서 영남에서는 72대 28의 비율로 박 후보 지지표가 쏟아졌으나 호남에서는 65대 35의 비율로 김 후보의 표가 나왔다. 지역별로 보면 박 후보가 영남지역에서 전승의 기록을 세운 데 비해 김 후보는 진안ㆍ무주ㆍ고흥ㆍ곡성에서는 오히려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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