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65회] 노동운동의 횃불 전태일 분신

2019.04.27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전태일열사의 어머니.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30분경, 한 청년이 전신에 석유를 뿌려 불에 휩싸이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면서 쓰러졌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아무도 덤벼들어 불을 끄지 못했다. 전신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이 청년은 병원에 실려 갔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한 채 산화하고 말았다.


청년의 분신은 한 무명 노동자의 죽음이었지만, 이후 한국사회에 미친 파장은 가히 태풍급이었다. 


독재정권이 재벌을 키워주고 악덕기업은 권력과 결탁하면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먹이사슬 구조에서 터져나온 저항의 불꽃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권리 위에 잠자던 노동자들이 깨어나고 현대적인 노동운동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봉제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가난 때문에 거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때 학생복을 제조하여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다 17세 때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일을 배웠던 전태일은 기술을 빨리 익혀서 1966년에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이 무렵 빚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의류 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 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볕도 들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도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 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동안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시 노동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한 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자 삼동회 회원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권리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놓이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병원에 실려 간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은 11월 18일 노동단체장으로 엄수되어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매장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죽을 때까지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전태일열사 생전 모습.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던져 “모두가 크게 하나 된다”는 이름대로 노동자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1970년 11월 27일 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인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박정희식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에 입각한 고도성장 정책의 해독과 일선 노동자의 참상을 정면으로 고발한 전태일 분신 사건은 7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1ㆍ2차 경제개발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9.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같은 고도성장이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에 입각해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쟁력의 원천일 뿐, 충분한 여가와 적정임금으로 소비를 진작시키는 내수시장의 역군이 되지 못했다. 


경제성장의 햇살은 수출 대기업과 이에 연관된 소수의 중ㆍ상류층만을 비출 뿐이고, 노동빈곤층은 성장의 그늘에 가린 채 생산현장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그리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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