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68회] 항명파동 주동자 가혹하게 처리

2019.05.06

제8대 국회의원 개원을 전후하여 사회 각 방면에서 발생한 각종 파동과 사태는 정치문제로 확산돼 국회의 대정부질의를 통해 논란이 증폭되었다.


신민당은 9월 30일 3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다. 


① 사회불안을 자극시킨 광주단지사건과 특수병들의 서울난입 사건 ② 1971년 들어 물가를 자극시킨 공공요금인상 책임 ③ 사법파동의 책임 등을 물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오치성 내무장관, 신직수 법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사실상 박정희를 겨냥한 공세였다.


신민당이 3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게 된 것은 공화당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공화당은 실권이 김종필 총리의 반대세력인 이른바 4인체제에 맡겨졌으나, 오치성이 내무부장관에 취임하면서부터 경찰의 요직개편과 지방관서장의 인사이동에서 4인체제에 가까운 사람은 거의 다 한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김종필 내각의 치안ㆍ인사행정에 공화당의 4인체제가 극심한 반발을 보이게 되고, 4년 후의 대권을 놓고 주류ㆍ비주류의 대립상을 빚고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신민당이 3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해임건의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강력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10월 2일 실시된 국회표결은 의외의 결과를 나타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과 신직수 법무장관은 재석 202명 중 가 91, 부 109 (무효2)로 각각 부결되었으나, 오치성 내무장관은 재석 203명 중 가 107명, 부 90명 (무효6)으로 통과된 것이다. 


공화당은 제2의 항명파동으로 숙당작업이 전개되었다. 박정희는 항명을 주도한 김성곤ㆍ길재호 두 의원을 출당시켜 의원직을 상실케 하고, 김창근ㆍ문창택ㆍ강성원 의원을 당명 불복종을 이유로, 내무장관으로서 해임건의안의 대상이 된 오치성 의원을 당론분열 조성의 이유로 각각 6개월간 정권처분했다. 


김종필(JP)은 1965년 말 민주공화당 의장에 오르지만 성곡 김성곤(SK)을 필두로 한 ‘4인 체제’의 견제에 시달린다. 60년대 후반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이었다. JP의 주류 세력과 대비해 공화당의 ‘신주류’로 불렸다. 4인 체제의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중앙포토]


김성곤ㆍ길재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은 그가 누구라도 가차없이 내치는 잔혹함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정신분석학자의 진단이다.


자기애적 환상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에서의 지속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자기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아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고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질 수도 없다.


이는 선거 결과에 대한 박정희의 분노가 무의식적 불안의 증폭에서 비롯된 것임을 의미한다. 국민들의 불신으로 인해 자칫 경쟁에서 패배하는 날이면 자기의 환상이 깨지는 건 물론이고 나아가 어머니가 자기에게 남긴 두 개의 유산, 즉 유기불안과 죽음에의 공포에 곧바로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융통성이 없는 박정희의 성격구조로 볼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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