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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죽음에서 솟아오른 별

2018.06.18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과서에 정글 탈출 기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는 장본인이 바로 한국이낳은 임종덕이란 인물이다. 한국 6-25전쟁이 만든 위대한 영웅 한국의 남아이다. 나는 그의 약력을 읽고 한국인의 생명력에 또 한번 감동하고 놀랬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벌서 크고 작은 전쟁이 53번 이상 하고 있다. 전쟁은 야수적이고 파축류(爬蟲)적인 인간들이 하는 행위이다.  어떻게 하면 이 동물적인 혈투를 이 지상에서 완전히 몰아 낼 수 있을까?

임종덕의 아버지는 뜻있는 훌륭한 애국지사였다. 일정시대에 중국에서 독립투사로 활약하다 1945년 해방을 맞는다. 아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만주로 해서 북한을 거처 남한으로 이주해왔다. 이윽고 6-25가 터졌다. 그는 공상당이 증오하는 임시정부 김구주석 계의 요원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 공상당은 임종덕의 부모와 큰형들을 무참히 총살했다. 그 광경을 임종덕은 나무위에 숨어서 목격했다. 그것은 그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가슴에 사무치는 한이었다.

임종덕은 12살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 들어갔다. 어느 날 고아들을 위한 원조물품들을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원장의 부정행위를 목격했다. 그는 사무실을 모두 부시고 20여명의 고아와 함께 서울역 방공호에 자리를 집는다. 그 아이들은 점차 불어나 100여 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그 많은 아이들을 책임지고 먹여 살리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담을 넘고 들어가 귀중품들을 흠쳐내어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하루는 서울 반도호텔 근처에 미 공군 장교들이 모인 곳을 가게 되었다.  고급 승용차 뒤 추렁크 문이 약간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꼬마가 미군들 틈을 뚫고 들어가 묵직한 가방 하나를 흠 쳐 달아났다. 미군헌병이 보고 추격해서 그는 붙잡혔다. 그 헌병은 꼬마절도범을 인근 경찰소에 넘기겠다고 상관에게 보고하고 연행하려고 하는 순간 한 장군이 잠깐 멈추게 했다.

그 장군이 바로 공군 총 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Steve Thomas White) 중장이었다. 장군은 헌병에게 그 애를 내 방 하우스보이로 하겠네. 내 방에 다리고 가게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나는 못 가요, 100명 이상 되는 내 아이들이 굶어 죽어요.” 하며 거부했다. 장군은 100명 고아들을 좋은 고아원에 보내도록 조치하고 임종덕을 집에서 일을 식혔다. 그 당시 장군의 외아들이 공군 대위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한 참 치열할 때 작전 중에 외아들이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장군은 아들을 잃고 몹시 슬픔에 빠져 괴로워했다.  장군은 임종덕을 서울중학교에 편입시켜 공부하는 것을 지켜 보고 그가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도 잘 직혀 보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마침내 임종덕을 아들로 입적 식혔다. “얘야, 종덕아! 너는 오늘부터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알겠니? 네 이름을 정식으로 내 가문에 양자로 입적했다.” 라고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꼭 껴안았다.  임종덕은 양 아버지를 부등 켜 안고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장군은 6개월 후에 미국 공군 기지 사령부로 발령이 떠러젔다. 장군은 임종덕과 함께 미국에 가서 유명한 붓싱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입학 식혔다. 처음에 임종덕은 아버지가 미국에 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다. “저는 한국에 남아서 군에 입대하고 우리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형님들을 죽인 공상당을 모조리 죽여 원수를 먼져 갚을거에요.” 하며 뜻을 밝혔다. 그러나 화이트 양아버진는 미

국에 가서 열씸히 공부해서 훈륭한 사람이 되어 원수갚는 방법이 더 좋다고 설득을 했다.

아버지는 무인이면서 서양 속담의 칼보다 펜의 힘이 위대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침내 임종덕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아버지는 임종덕을 미국의 유명한 사립 붓싱 아카데미 고등학교 1 학년에 입학식혔다.

밤을 새우며 매일 영어단어 100개 씩을 외워서 3년간 9만 단어가 넘도록 큰 사전에 빨간 줄이 쳐졌다. 참으로 피나는 공부를 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하바드 대학에 무난히 입학했다.

임종덕은 대학 시절, 방학 동안에도 집에 안 가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957년 대학 2 학년 때, 앞으로 인류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추세를 테마로 주제삼아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이 대학 매거진에 게재됐다. 이 논문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센세이쇼날한 잇슈였다. 동북 아시아의 중국이란 정치적 파워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미국의 언론과 정치계에 비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키신저가 이 논문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심각하게 통독했다고 한다.  

    1972년에 닉슨 대통령을 대동하고  중국에 가서, 정상외교를 맺은 것이 15년 후의 일이었다. 임종덕은 1020년 내다 보고 쓴 논문이었다.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를 바탕으로 표절하다 싶이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뉴스윅지()에 올리고 미국 정치사상 지대한 관심을 불려 일으켰으며 이여 록커펠러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후 지금까지 그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극동지역의 총 책을 맡아 암약하고 있다.  몇달전 미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을 화나게 만들지 말라고 백앇관에서 충고했다고 언론에 전해졌다.

그처럼 임종덕의 아이디어는 한국 민족의 잠자던 장구한 문화 속에서 용솟음 쳐 나왔다. 임종덕의 박사 논문은 “세계 2차 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국제관계 정치학논문으로 정치학 박사가 되었다. 이날 박사학위 시상식에는 하바드 대학 역사 이래 미국의 큰 별들이 모여 빛내 주었다. 앙 아버지 화이트 장군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임종덕을 끌어 안고 축하해 주었다. 장군이 83세에 별세할 때 내 아들을 잘 키워 준 하바드 대학에 전 재산을 기증했다.

임종덕은 25살 때 군에 입대해서 4년간 특수 훈련을 일등으로 졸업한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미대사관 국제관계 외교관 근무였다.  미국 정부에서는 임종덕을 아세아 극동지역의 화려한 무대에서 외교관으로 양성할 목적이었다.

그러고 6개원 후, 임종덕은 특공 대원으로 월남전에 자원해서 참전한다. 그 사명은 월맹 군 장성 납치 그리고 월맹 군에 의해 포로가 된 미군들을 구출해 내는 특공대였다. 그는 어느 날 작전을 마치고 귀대 중 잠복했던 많은 월맹 군의 습격을 받아 그가 거느린 부하 세 명을 도피 식히고 그는 포로가 된다.  그는 얼마 후 구사일생으로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

그는 또 그 후에 제2차로 포로가 된다. 그는 포로 수용소와 그 위치를 잘 알기 때문에 너무 인접해 작전하다 잡혔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 살인 게임(Russian Roulette)에 말려들었다. 임종덕은 4초 탈피 작전을 썼다. 적이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1초에 한 명씩 녹아웃 식 키고 도망치는 수법이다. 그는 벼락치는 순식간에 4명을 해치우고 바로 옆에 바다 속으로 점프해 들어갔다. 그 바다에는 살인 마 악어와 바다 독사가 우글거리는 무서운 사해 바다였다. 그는 악어와 뱀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어려서 부모따라 교회에 가서 유치반에서 부터 갖게 된 신양심이 자기도 모르게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10분간 물속에 한 곳에 잠복해 있었다.  월맹 군 수 십 명이 임종덕이 이미 멀리 도망간 것으로 간주하고 100 메타 200메타 내려가며 사격을 했다.  이윽고 임종덕은 총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헤엄을 쳐서 월맹군의 미치지 않는 무인도로 다 달았다. 그는 그 섬에서 15일 간 개구리와 뱀을 잡아 먹으며 정글 속에 너구리와 원숭이들과 같이 살았다.

그리고 16일 되는 아침 미군 헬리콥터가 날아왔다. 그는 너무 기뻐서 모래 사장으로 나가 춤을 추다시피 신호를 보냈으나 오히려 그들은 월맹군인 복장을 했으므로 기총소사를 맹렬히 퍼부었다. 그는 급히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숨어서 살아났다. 그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가?’ 크게 실망해서 헤매는 중에 또 한 차래 그 헬리콥터가 오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또 백사장으로 나가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흔들며 뛰면서 신호를 보냈다.  그 때 헬리콥터 조 정사가 저 사람은 틀림없이 월남군 패잔병 같으니 구조하자고 제이했다. 그리고 임종덕은 헬리콥터에 탑승하자 마자 졸도해서 해군병원으로 운송해 갔다.  몇 시간 후에 깨어났다. 이것이정글 탈출 기로 육사 교과서에 기록하게 된 이유였다.  월맹군 군복을 입은 임종덕은 수가진에 의해서 심문이

시작되었다.  가족사항에 아버지가 화이트 공군 사령관이라고 하자 그들은 깜작놀라며 미국의 아버지에게 조회를 했다.  아버지는 울면서 엄마와 함께 너를 위해 밤 낮으로 기도하고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리해서 이 기적같은 사실이 백악관 죤슨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한 열흘 간 사이공에서 휴양 후 죤슨 대통령이 백아관에서 호출했다. 은성무훈 훈장과 한 계급 중령 승진을 수여했다. 그자리에서 화이트 장군을 치하하고 9척이 넘는 거구의 죤슨 대통령은 키가 작은 임종덕을 허리를 굽혀 내려다 보며 그렇게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런 용기가 솟아나며 훌륭한 지혜가 나오느냐고 웃으며 물었다. 그 후에 임종덕은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을 대동하고 안보 보좌관 자격으로 중국에 가서 모택동 당총재와 주은래 주석을 수차레 만나 미중 정상외교 회의를 성사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주은래는 자기 친 자식 처럼 아끼며 마지막 잉름자 라이

()임종래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임종덕은 우리 한국이 낳은 별이었다. 한국이란 너울속에서 자란 재목이 대거 속출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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