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천도 _잘 못된 풍수_
이씨 왕조의 태조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 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즈음 마침 주원장이 세운 명(明)나라도 수도를 북경에서 남경으로 옮겼고 옛날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철원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긴 예가 있어 여러 가지 이유로 천도가 필요했다. 개성은 왕건의 후손인 왕씨들이 대대로 오백년 동안이나 살던 곳이어서 이곳에는 고려에 충성하는 백성이나 신하들이 많아 새로운 왕조를 탐탐치 않게 여기며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더욱 그러했다. 이리하여 신도읍지가 될 만한 후보지를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천도를 결심한 이유는 상기한 이유 외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 계기가 있으니 그것은 이성계가 꾼 꿈이었다.
꿈에 한 거한이 나타나 송도에 흐르는 강물을 엎드려서 다 마셔 버리자 물이 말라 강바닥이 다 드러났다. 이성계는 급히 “당신이 송도강물을 다 마셔버리면 우리 송도백성들은 어떻게 살란 말이요?” 라고 하며 따지자 그 괴한은 씩 웃으며 “당신은 다른 강물을 마시면 될 것아니요.” 라고 한 뒤 사라졌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곰곰이 생각한 뒤 천도계획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사실 고려 때에도 풍수지리학상 수도 개경이 오백년이 지나면 지덕(地德)이 쇠퇴하는 곳이라 길지(吉地)를 택하여 왕이 나가 얼마간 머물면 왕실이 계속 존재한다는 보완책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사상 속에 발생한 소란이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이다. 그래서 고려조 문종(文宗)이래 한양을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 여기를 남경(南京)으로 정하고, 공민왕 때에는 한양에서 왕과 신하들이 6개월 동안 머문 일이 있으며 이후 공양왕 때에는 아예 남경(南京)인 한양으로 천도계획을 세웠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도 있었다.
이성계 역시 한양이 뛰어난 풍수를 지녀 적지라 여기고 한양에 수도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한양천도가 한창 추진 중이던 어느 날 대신 권중하가 계룡산 신도안이 지리적으로 영험하고 풍수가 뛰어나 한양보다 더 왕실이 번성할 적지라고 주장한다. 이는 풍수지리학상 타당한 주장이었다고 필자역시 생각하는 바다. 이성계는 이 주장에 동조하여 계룡산 신도안에 천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성곽기초공사를 명하기에 이른다. 이성계가 신도안 일대를 돌아본 뒤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신모(神母)가 나타나더니 “여기는 정씨가 도읍할 터인데 왜? 여기서 역사(役事)를 해? 이씨들 도읍터는 한양이여!” 라고 야단친 뒤 사라졌다. 이 꿈을 꾸고 나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하륜이 계룡산은 풍수지리상 적지가 아니라고 주청했다. 하륜은 무악(지금의 신촌일대)이 도읍지로서 적지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성계가 신하들을 수행하고 신촌일대를 답사하니 신하들이 죄다 적지가 아니라고 반대한다. 결국 남은 곳은 한양뿐이었다.
한양에서도 신무문(현재 경복궁자리)에 이르러 관상감 판사에게 지세를 물으니 “조선팔도에서 풍수가 제일 뛰어난 곳이 개경이고 두 번째로 뛰어난 곳이 이곳입니다.” 라고 답한다. 이성계도 이곳을 흡족히 여기고 도읍지로 정했다. 이성계는 도읍지를 한양으로 하라고 알려준 계룡산 신모(神母)의 현몽에 감사드리려고 꿈을 꾼 장소에 신은사(神恩寺)라는 절을 세웠다. 이후 이 절은 고종 때 신원사(新元寺)로 고쳐 불렀는데 지금까지도 신도안에 현존하고 있다. (한국가시면 한번 가 보시길~) 풍수 지리학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한양의 지세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한양의 지세를 풍수학상 상세히 살펴보면 주령(主嶺)이 바로 곧게 내려오다가 안 옆으로 빗나갔기 때문에 장손보다는 하자(下子)가 잘 되는 곳이다. 이리하여 이조의 역대왕들을 보면 장손은 즉위하면 거의 요절했고 세종, 성종, 영조 등 하자(下子)의 치세가 번성했다. 이조의 왕은 28대 중 장자로 이어진 왕은 10명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이중엔 요절한 왕이 많다. 장자(長子) 중 문종은 2년, 단종은 3년, 인종은 1년, 경종은 4년을 못 채우고 요절했으며 연산군은 쫓겨났다. 장자 중 왕 노릇을 그나마 제대로 해 먹은 이는 숙종을 포함해 5명이 겨우 있다.
이에 비하여 고려의 경우 총 34대 왕 중 28대가 순서대로 별 파란없이 장자순으로 왕위가 이어졌으니 한양이 개경보다 풍수가 떨어진다는 관상감 판사의 말은 사실인 것이다. 이런 지세 외에 궁궐도 문제가 있었다. 무학 대사가 “인왕산을 진(鎭)으로 삼고 도봉산은 청룡, 안산은 백호로 삼으소서” 라고 풍수학상 올바른 주청을 하였는데 권신인 정도전이 틀고 나왔다. “옛부터 궁궐은 남향으로 짓는 것이 상식인데 동향으로 짓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무학 대사가 망녕이 난 모양입니다!” 정도전의 도발에 성질난 무학대사 반격에 나서는데 8백년 전 의상대사가 쓴 산수비기(山水秘記)를 예로 든다. “옛날 8백년 전 의상 대사께서 예언하시기를 ‘도읍을 한양으로 정할 때 중의 말을 들으면 연존할 희망이 있으나 만약 정씨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 이를 시비하여 그의 말대로 하면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 이성(異性)에게 찬탈의 화를 당하고 2백년 쯤 지나면 판탕(板蕩)의 난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는데 중이란 저를 말하고 정씨성을 가진 사람이란 저 싸가지 없는 정도전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으니 8백년 전에 의상대사가 지금 있을 일을 정확히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어찌 그분을 신승(神僧)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한다.
이 비기에는 이외에 목면산(현재의 남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형상과 같은지라 이곳에 수도를 정하면 사대부의 추행이 많으며 온 나라가 여자로 인해 시끄러워질 것이라 예언했는바 이조 중기이후 정난정, 장녹수, 장희빈, 민비 등 여자가 권세를 잡으면 나라가 시끄러워졌고 민간에서도 광해군 때의 김개시, 자유당 때 박마리아, 현대의 장영자 등 소란을 일으키는 여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씨 왕조가 출현하기 8백년 전에 무학 대사와 정도전이 궁궐 짓는 문제로 티격태격할 것 까지도 미리알고 예언한 의상대사의 신통력이 대단하다. 궁궐은 정도전의 주장대로 남쪽을 향해 지어지게 된다. 풍수학상 잘못된 방향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이씨 왕조 28대 왕들 중에 세종, 영조, 정조 등 일부 왕을 빼고 제대로 왕 노릇을 한 성군은 드물었고 이러다보니 내내 풍파가 지속되었다.
이씨 집안 자체로 본다면 이렇게 패륜이 많은 집안도 없을 것이다. 건국 초기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칼을 들고 싸우고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조카가 삼촌을 죽이고 사촌이 사촌을 죽였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싸우고 한 이런 난장판 같은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만백성의 아버지라는 소위 이씨왕들의 행태였던 것이다. 왕다운 왕은 보기 어려웠던 이씨 왕조는 잘못된 풍수로 인하여 혈육상쟁의 무도(無道)한 불운의 집안이 되었던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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