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전쟁영웅들의 비참한 최후

2022.07.19





                전쟁영웅들의 비참한 최후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공평치 못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예전에 ‘연평해전’이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성황리에 상영 된 적이 있는데 이때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한 장병들은 당시 좌파정권 하인지라 제대로 전쟁영웅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전사’처리가 아닌 재직 중 사망한 순직처리를 받아야했으며 놀러가는 수학여행 중 사망한 세월호 사망자들이 수 억 원의 사망보상금을 받게 된데 비해 목숨을 버리며 까지 조국을 지켜낸 사망 장병들은 채 3천 만 원이 안 되는 순직배상비 밖에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그들의 영결식에 대통령은커녕 국방장관까지도 외면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다 그들의 운수소관이다. 


아주 오래 전 임진왜란 시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1592년 (선조 25년)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 왜장 3명이 이끄는 20만 왜군이 새벽안개를 틈타 부산앞바다에 밀어닥쳤다. 부산 첨사 정발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었고 군민은 몰살당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의 상륙소식을 듣고 단단히 대비하고 사력을 다해 군민들과 방어했으나 엄청난 왜군의 힘에 결국 만 여명의 군민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용감한 저항은 여기까지였다. 관군의 패배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지방 관리와 군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는데 급급했다. 왜군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북상할 수 있었다. 겨우 4월29일에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완전히 궤멸되고 만다. 신립장군의 패배소식을 들은 조정은 난리법석을 떨며 선조를 의주로 몽진시킨다. 신하들도 제각기 저만 살겠다고 도망치기 바빴다. 


6.25전쟁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국민을 속였던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임금이 저만 살겠다고 백성들을 버린 채 몰래 도망간 것을 안 백성들은 궁궐에 난입해 분탕질을 하는 치욕적인 내분의 모습을 보였다. 왜군은 텅 빈 한양을 5월2일 접수하였다. 부산을 침범한 후 정확히 18일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했으니 부산에서 출발하여 아무 일없이 슬슬 걸어온 셈이었다. 왜군은 느긋하게 쉬면서 북상을 계속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고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까지 포로로 잡았다. 한심한 일이였다. 허나 예나 지금이나 숨은 애국열혈지사는 반드시 있는 법! 


민족의 성웅 이순신장군(1545~1598)이 그 선봉에 선다. 이순신장군은 5월4일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뒤 이후 사천과 당항포 에서 연이어 왜의 수군을 대피하였으며 연이어 6월말과 7월초에 거쳐 총공세로 반격에 나선 왜군을 한산도에서 괴멸시켰다. 이로 인해 이순신장군의 수군은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냈으며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긴 왜군은 고립되고 만다. 해상에서 이순신장군의 활약이 있을 때 육지에서는 도망친 관군을 대신하여 의병이 궐기하여 관군대신 왜병에 저항하였다. 의병장들은 스스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고 직접 병장기를 만들고 군량을 자급하였다. 수없이 많은 의병들의 저항에 왜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이런 전쟁영웅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우선 이순신장군의 경우 그의 전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가 일본의 재침략으로 절대 절멸의 위기에 몰린 조정이 전멸 하다시피 한 수군을 살리라는 명에 의해 백의종군하지만 그의 죽음에는 큰 의혹이 있다. 


함대사령관의 경우 사방으로 안전막이 쳐진 안전한 참호 속에서 전군을 지휘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순신장군은 전면에 나서 독전하다 적의 총탄을 맞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순신 스스로생각하기를 어차피 승리한다하여도 어차피 반대파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알기에 장군답게 전장에서 차라리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라는 자살론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조임금은 철저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공을 무시하고 명나라만을 숭배했다. 어전회의 때 말하기를 “명나라군대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찌 왜적을 물리쳤겠는가?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의 힘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고 까지 폄하하였다. 


의병장 이산겸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조헌의 의병부대 잔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런데 누군가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송유진 반란의 주모자로 그를 무고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참수당하고 만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 석저촌 출신으로 학문도 깊고 무예도 뛰어나 ‘지혜는 제갈공명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고 평가받은 인물이다. 무게가 백근이나 나가는 큰 철퇴두개를 허리좌우아래 차고 다니며 큰 활약을 해 왜군들에게 신장(神將)이라고 불리며 두려움을 주었다. 1593년 겨울 어머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에서 의병 수천명을 규합하여 가는 곳마다 왜적을 박살내서 왜병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이 아닌 모함이었다. 


1596년 7월에 일어난 이몽학의 모반에서 체포된 관련자들의 진술에서 장수가 김덕령이고 함께 거병하기로 모의했다는 허위진술이 나와 체포되었다. 이를 틈타 김덕령의 전과를 시기한자들이 “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을 베듯하였으며 또 모반할 조짐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면 큰 후환이 있을 것” 이라는 참소(譖訴)가 이어져 26일 동안 정강이뼈가 다 부서진 상태가 될 때까지 고문 받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도 큰 공을 세운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탄핵을 하였다. 병사 조대곤은 곽재우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했고 왜란 때 왜병을 맞아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치다 곽재우 장군에게 비겁한 놈이라는 욕과 함께 목을 치겠다는 야단을 맞은 경상감사 김수가 원한을 품고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며 비방보고를 올렸다. 선조는 노발대발하며 “함부로 임금이 임명한 감사를 죽이려고 한 자가 도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하며 은밀히 중사를 파견하여 순검을 사칭하면서 곽재우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였다. 


김덕령이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본 곽재우는 멀리 도망쳐 깊은 산속에 은거하다 66세의 나이로 도망자 신분으로 죽었다. 이름 없는 의병들도 상을 받기는커녕 정부에서 강제로 군인으로 만들어 고초가 심한 변방이나 수군으로 강제 징집했기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최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그들의 운수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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