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죽어서도 매일 만나는 사랑, 산타 크로체 성당-2(피렌체)

2018.08.01




 



 

산타 크로체 성당

2 
피렌체






이탈리아인들은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긴다.




단테, 다 빈치의 가묘는 물론,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기베르티, 로시니, 마키아벨리, 마르수피니 등
당대 최고의 석학 또는 예술가들이 묻힌 영광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주 산타 크로체 성당(1)에서 언급하지 않은 두 묘지의 주인공이 있다.
극작가이자 비극 시인인 비토리오 알피에리(Vittorio Alfieri)와 알바니 백작부인 루이제다.
두 사람은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불멸의 연인이다.




루이제는 남편이 왕권만 되찾으면 대영제국의 왕비가 될 수도 있었던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슈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제: 영 프리텐더의 부인’,
남편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2세의 손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
찰스는 자코바이트들이 지지하는 젊은 참주로 프랑스, 스코틀랜드, 이탈리아를 전전했던 비운의 왕자다.
자코바이트는 영국 명예혁명 때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와 그 자손들을 받들어 왕위의 부활을 꾀했던 세력을 말한다.




1745년 프랑스를 떠난 24세의 찰스 왕자는 글렌피난(스코틀랜드)에서 왕위 계승권을 되찾기 위한 깃발을 꽂는다.
여기에 매클린, 매클라클란, 아톨 하일랜더 등 하일랜드의 씨족 전사들이 합류하자 반란은 곧 승리하는 듯 했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스코틀랜드 고지 지방의 전사들이 창칼을 들고 여기저기에서 합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포와 총을 앞세운 영국군(하노버 왕가)에게 자코바이트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찰스 왕자는 경험많은 하일랜드 지휘관의 조언을 무시하는 실수를 한다.
결국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 1746년 4월 16일)에서 하일랜드 군대는 대패했다.




사망자는 1,000 명이 넘었고 100여명의 자코바이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비해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하노버 왕가의 손실은 부상자 254명 사망자는 50명에 불과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찰스 왕자는 탈출하여 프랑스로 건너 간다.
그 찰스 왕자와 결혼한 여인이 바로 알바니 백작부인인 루이제다.




전투에 패하고 돌아 온 찰스 왕자는 왕권을 되찾지 못한 좌절감에 어느새 술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52세에 결혼한 여인이 당시 19세의 루이제(Princess Louise of Stolberg-Gedern)였다.
두 사람은 알바니 부처 백작 부부가 되어 1774년부터 피렌체에 자리를 잡았다.



*파브르가 1796년에 그린 "알피에리 백작과 루이제(Alfieri e la Contessa di Albany)
 

이 때 백작 부부 집에 자주 드나 들던 사람이 25세의 패기만만한 젊은 시인 알피에리였다.
어느 때부터 인가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은밀한 관계를 오랬동안 유지하게 된다.



*늙으며 아내를 두드려 패는 술주정뱅이가 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Charles Edward Stuart)

한편 찰스 왕자는 매일 술을 퍼마시며 아내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루이제는 결혼 8년만에 남편 곁을 떠나 수도원으로 피신해 버린다.
1784년 4월 부터 찰스 왕자와 루이제는 공식적으로 별거를 시작하게 됐다.



*파브르가 1793년에 그린 알피에리 백작의 초상(Ritratto di Vittorio Alfieri) = 우피치 미술관

알피에리는 1749년 피렌체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교육을 받았다.
짧은 군 생활(피에몬테 육군: 현재 육군사관학교)을 마친 후에는 견문을 넓히겠다고 여행을 떠났다.
그가 여행한(1765-1775) 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네델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러시아 등이다.
루이제도 예쁜 여인이었지만 알피에리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당당한 체격의 미남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따랐지만, 그는 늘 공부하며 자신의 지식을 키워 나갔다.
책을 읽고 라틴어를 배웠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그리스어까지 마스터 할 정도였다.





여행 중 알피에리는 각국의 연극을 보고 이탈리아에도 비극적인 작품을 만들 것을 결심한다.
데뷔 작품으로는 1775년에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 클레오파트라(Cleopatra)가 있다.
1782년에는 14개의 비극 작품을 썼는데 유명 작품으로는 사울, 미르라, 로스문다 등이 있다,



*파브르가 1793년에 그린 루이제의 초상(Ritratto di Luisa Stolberg) = 우피치 미술관

1784년 8월 루이제는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나 콜마르(프랑스)에서 알피에리를 만나 두 달을 함께 보낸다.
이후 두 사람은 볼로냐, 파리 등을 다니며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1786년 12월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으며 2년 후 찰스 왕자가 죽은 후에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에서 루이제는 살롱을 오픈했으며 당시의 유명한 작가, 예술가들을 초청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자 두 사람은 거처를 피렌체로 옮기게 된다.
여기에서도 루이제는 살롱을 오픈했지만 규모는 파리보다는 작았다.




그래도 루이제는 매일매일이 행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는 것이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1803년 알피에리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제는 화가 ‘프랑스와-자비에 파브르’와 자주 만나게 된다.
파브르는 알피에리가 생존시에도 함께 어울렸던 사이였고 두 사람의 초상화까지 그린 프랑스 출신 화가다.
알피에리는 루이제보다 3살이 더 많았고 루이제는 파브르 보다는 14살 연상이었다.
루이제는 자신과 알피에리가 함께 있는 그림을 파브르에게 그려 달라고 요구한다.



*파브르가 1813년에 그린 "A View of Florence from the North Bank of the Arno" =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파브르는 '아르노강 북변에서 바라 본 피렌체 풍경'이라는 작품을 1813년에 완성했다.
초원에 알피에리가 엎드려 있고 루이제는 사랑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 보고 있는 그림이다.
그 옆에서 와인병을 통채로 마시는 사람은 파브르 자신으로 보인다.
웅장한 두오모 돔이 보이는 당시의 풍경은 지금의 풍경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현재 이 작품은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루이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오자 파브르에게 특별한 부탁을 한다.
자신의 시신을 알피에르가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함께 묻히게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 재산을 파브르에게 물려 주고 루이제는 눈을 감는다.
그녀의 시신은 페르디난디 3세(당시 토스카나의 대공)의 명령에 의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됐다.
기념비는 파브르의 절친한 친구 샤를 페르시에(Charles Percier)가 설계했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돼 있는 루이제(왼쪽)의 묘지와 비토리오 알피에리(오른쪽)의 묘지

이곳에는 유명한 위인들이 많이 있지만 죽어서도 두 사람 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250년 전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랑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는 고향으로 돌아 가 루이제의 상속재산으로 미술관과 미술학교를 설립한다.
바로 프랑스 몽펠리에에 세운 "파브르 미술관"이다.


글, 사진: 곽노은

 



*표시의 이미지(7장)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좋아요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