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하다(상)

2017.12.07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하다 (상)


걷기만 해도 마음이 착잡해지는 여행지가 있다.
바로, 폴란드의 오슈비엥침(Oswiecim) 이라는 도시.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라고 부른다.
아우슈비츠 입구 철문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수많은 입장객 중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민족은 작은 원형모자(키파)를 쓴 유대인들이다.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철문 입구.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참담했던 역사를 잊지 않으려 아우슈비츠를 찿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선생님을 따라 단체로 견학 온 어린 고등학생들도 있고,
경찰 제복을 입고 온 이스라엘 경찰들도 있다.

아우슈비츠가 생긴 것은 게슈타포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에 의해서였다.
히믈러는 1940년 4월, 루돌프 회스(Rudolf Hoss)를 아우슈비츠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수용소를 방문한다.
원래, 폴란드 포병막사였던 아우슈비츠 주변에는 광대한 땅들이 널려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이었기에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가 회스에게 수용소 캠프의 건설을 명령한 것은 1940년 4월 27일.
첫 번째로 끌려온 포로들은 유대인 아닌 폴란드 정치범들이었다.
1년쯤 세월이 지나자 수용소 인구는 3만명을 훌쩍 넘었다.
1941년 3월, 히믈러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방문하고 수용소의 대대적인 확대를 명령했다.
그래서 세워진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제2호로 불리는 비르케나우(Birkenau) 집단수용소다.
그런데, 비르케나우 정문 건물은 원래 1903년에 세워진 학교 건물이었다고 한다.



영화 쉰들러의 리스트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아우슈비츠-비르케나르 집단수용소 정문


나치는 그 곳에 큰 문을 만들고 철로를 건설하여 유대인들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1941년 7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13동에서 포로 한 명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13동에 수용된 모든 포로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잠을 설쳐야 했다.
탈출자가 24시간 안에 잡히지 않으면 13동 수용자중 열 명이 대신 처형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친위대 장교 칼 프리취(Karl Fritzsch)는 처형시킬 포로들을 골라 내기 시작한다.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어요.
저를 살려 주세요!’ 목숨을 구걸하던 포로는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였다.
이때였다, 처형자로 지목되지 않은 13동의 수감자 한 명이 친위대 장교 앞에 서며 말한다.
‘저 사람을 대신해 제가 죽겠습니다. 저는 아내도 아이도 없습니다.’
날카롭게 수감자를 바라 보던 친위대 장교는 이 제의를 받아 들이고 가조우니체크를 살려주었다.
그가 바로 성인으로 시성된 막시밀리아노 콜베(Maximilian Kolbe) 신부다.
콜베 신부는 1941년 8월 14일, 독극물 주사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대거 아우슈비츠로 수용된 날은 1942년 2월 15일이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됐다.
모든 수감자에게는 이틀치의 식량과 반합 하나, 숟가락 하나, 담요, 가방, 작업화 등이 지급됐다.
지금도 박물관에는 희생자들이 남기고 간 110,000켤레의 구두와 신발,



강제수용소 희생자들이 남기고 간 110,000켤레의 구두와 신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머리카락(7톤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2톤), 836,525점의 여성 의류,
348,820점의 남성 의류, 3,800개의 여행가방, 460개의 인공 수족, 나무로 제조된 칫솔과 면도용품,
그리고, 한 통으로 400명 정도를 질식사 시킬 수 있었던 치클론 B(Zyklon B)가 전시돼 있다.
치클론 B를 떨어트린 공동샤워실에는 가짜 샤워기가 달려 있어 희생자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가스실에서 희생자들이 숨을 거두기까지의 시간은 20분 정도.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금니와 반지 등을 뺀 후 소각로로 보내졌으며, 뼈는 갈아서 비료로 사용됐다.
빌딩 11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중요한 빌딩이었다.
이곳에서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포로들이 잔인한 심문을 받은 후 총살형 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총살에 의한 처형장은 옆 건물 빌딩인 10과 빌딩 11 사이에 있었다.

 빌딩 10유전학을 연구한다는 핑계로 잔혹한 인체실험을 감행했던 곳이다.

 유대인 대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전멸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것이었지만,

 포로들 중에는 유대인 외에도 동성애자, 집시, 보이스카우트, 정신박약  장애인, 쌍둥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치료병동(19, 20, 21, 28)이 있었지만 이것은 포로들을 치료하려고 만든 병동은 아니었다.

 의사가 보기에 병약해 보이는 포로는 독극물 주사를 놓든가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은 포로들은 좁고 더러운 막사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포로들이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하루에 딱 한 번, 시간은 10초였다고 한다.

 극한의 상황에도 콜베 신부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포로들은 아우슈비츠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몸부림 치며 죽어갔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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