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

말러의 마지막 고백(교향곡 제9번)

2017.12.05







말러의 마지막 고백(교향곡 제9번) 


*여름별장이 있던 도비아코(토블라흐)에서의 알마와 구스타프 말러(1909)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삶은 매우 파란만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으며, 지휘자와 작곡가로 화려한 삶을 살기도 했다.
갈채를 받았지만 그를 향한 야유도 많았다.
불타는 사랑을 체험한 반면, 아들 나이의 젊은 남자에게 아내를 빼았기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교향곡 제9번은 격정적 삶을 살았던 말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작곡한 작품이다.
현세와 내세를 주제로,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그의 마지막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말러의 모든 음악이 다 그렇지만, 특히 교향곡 제9번에 한번 심취되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지휘자 정명훈도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놓고 본다면,
베토벤이 시작한 일을 말러가 끝냈으며 말러만큼 더 오케스트라를 잘 사용한 작곡가는 없었다”고 말한다.




돌로미티의 친퀘토리(Cinque Torri)


유대인의 피를 받은 말러는1860년 보헤미아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났다.
칼리슈트는 지금은 체코 땅 이지만 말러의 출생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난폭했고 어머니 마리는 온화한 여인이었다.
그들 사이에 무려 14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첫째 아들 이시도르가 생후 1년 만에 죽어 둘째인 말러가 장남이 됐다.
그후 동생들 6명은 낳자마자 죽거나 1, 2년 만에 각종 병으로 사망했다.
말러 가족은 거의 매년 장례식을 치를 정도였다.
말러가 15살 되던 해에도 1년 밑 동생 에른스트가 심낭질환으로 숨졌다.
그와 함께 했던 14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죽음에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다.
말러는 동생이 죽어가던 몇 개월간 침대에 누운 동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 같던 동생을 떠나보냈다.
29세때는 동생 레오폴디네가 뇌암으로 죽었고, 35세때는 막내 남동생 오토가 22살의 한창 나이로 권총자살 했다.
오토는 장래가 촉망되던 지휘자겸 음악가로 에른스트가 죽은 후 말러가 가장 아꼈던 동생이다.
오토는 큰 형에게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고 자살, 말러의 충격은 더욱 컸다.
14명의 형제중 무려 9명에 달하는 동생들이 말러가 35세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10년경말러의 여름별장이 있던 도비아코(토블라흐)의 아름다운 풍경

 

 

말러는 37세가 되던 1897년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이 됐고 5년 후에는 ‘알마 쉰들러’와 결혼했다.
두사람 사이에는 딸 둘이 태어났는데 1907년 첫 딸이 성홍열로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딸의 죽음으로 우울해 있던 말러에게 심장 판막 결함이라는 진단이 내려져 이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정열을 모두 쏟아부었던 비엔나 오페라 극장 총감독 자리에서 물러나 뉴욕으로 떠났다.
설상가상, 몇 년 후에는 아내 알마가 청년 건축가를 만나 사랑을 나누기 시작, 말러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린 시절부터 늘 그의 곁에 있었지만 이제 말러는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도비아코(Dobbiaco토블라흐)에 위치해 있는 구스타프 말러의 여름별장


1910년, 말러는 도비아코(토블라흐)의 여름별장에서 교향곡 제9번을 쓰며
“오 사랑이여 가버렸구나! 안녕! 안녕!” 이라는 글을 악보 밑에 휘갈겨 썼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이 교향곡의 제목은 ‘이별’이 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말러는 돌로미티 산군이 보이는 이곳에서 위대한 작품을 창작해 세상에 내놓았다.
1911년, 말러는 교향곡 제10번의 작곡을 시작했지만 채 끝내지 못하고 5월18일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장녀의 유골과 함께 비엔나 교외 그린칭 묘지에 안장됐다.
제자 발터의 의하면 장례식날 엄청난 폭우로 장례식을 치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관이 땅으로 들어 가는 순간 갑자기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쳤다고 한다.




돌로미티 산군을 트레킹 하고 있는 3명의 젊은이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사건건 말러를 경멸했던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교향곡 9번이 왜 이렇게 가슴을 치는지 나는 돌로미티(도비아코)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 속에는 돌로미티의 비경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뻥 뚫렸다.

글, 사진(2,5) :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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