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여인, 움 쿨숨(Umm Kulthum)

2017.12.19


움 쿨숨
(Umm Kulthum)


1967,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패한 아랍인들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이때 혼연히 일어나 조국 이집트는 물론 주변의 모든 아랍국가, 그리고 프랑스 파리 등 유럽을 돌며

아랍인들을 위로한 여성 가수가 있었다. 바로 ‘움 쿨숨’이다.

움 쿨숨은 1904 5 4일 이집트의 어느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결혼식 또는 생일잔치 집에서 노래를 불렀다.

식구들이 모두 노래하는 가운데 그녀 또한 남자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1923년 가족과 함께 카이로로 이주한 쿨숨은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시인 ‘아하마드 라미’를 만났다.

라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 출신으로 움 쿨숨에게 프랑스 문학을 가르쳐 주고
그녀의 노래에
137편의  가사를  붙여 주기도 했다.

라미의 영향으로 쿨숨은 떠돌이 가수에서 문학과 시를 읊는 지성파 가수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 류트의 명장이자 작곡가인 ‘모하멧 엘 카삽지’의 소개로
‘아라비안 극장’에 데뷔
, 이름을 떨치게 된다
.

그후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베이루트, 트리폴리 등 여러 아랍국가를  돌며 투어를 가졌다.

콘서트는 보통 저녁 10시에 시작하면 새벽 4시나 돼서야 끝났다. 

1965년 발표하여 움 쿨숨의 대표곡이 된 엔타 오므리(당신은 나의 생명)

시를 읊는 듯 노래하는 ‘카시다’ 형식의 송시로 장장 40분짜리 노래다.

그 다음 유명한 곡이 알필릴라 울릴라(천일야화).

그녀의 DVD를 보면 정장을 한 신사숙녀 수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오케스트라
20명의 연주자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오른손에는 실크 목도리를 휘어잡고, 아랍인의 ‘한’을 모아 노래하는 장면은 듣는이의 숨을 멎게 한다.


 
움 쿨숨
(Umm Kulthum)

 

40년대에 움 쿨숨은  많은 뮤지칼 영화에도 출연하며 아랍 최고의 가수겸 배우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1952년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이집트혁명이 일어나기 몇달 전 왕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이집트음악협회로부터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제재를 받은 것이다
.

움 쿨숨의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라디오에서 그녀의 노래가
들리지 않자 의아해 했고
, 결국 모든 사정을 알게 됐다.

그 놈들 누구야? 미쳤구만!’ 

온 이집트가 움 쿨숨을 좋아하는데 노래를 못하게 하면 국민 전체가 우리를 적대 하잖아!’

나세르의 고함소리에 그녀에 대한 규제는 당장 풀렸다.

이후 그녀와 나세르와의 협력관계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됐다.

당시 라디오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로그램은 매달 첫주 목요일에 방송되던 그녀의 콘서트였다.

콘서트 시간이 가까워지면 시민들 대부분은 일찍 귀가해 카이로 시내가 온통 조용했다고 한다.

움 쿨숨의 노래가 끝나면 나세르는 곧바로 연설을 하는 순서였다.


 나세르와 움 쿨숨

 

1967,  6일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하자 처음에는 움 쿨숨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칩거에 들어갔다.

소식을 들은 나세르가 그녀를 대통령 궁으로 불렀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당신의 노래는 전 아랍을 단결시킬 수 있지 않소?’ 

힘을 얻은 그녀는, 이집트와 유럽과 모든 아랍의 국가들을 다니며 콘서트를 가졌다.

그리고 콘서트에서 얻은 모든 수익금과 자신이 아끼던 귀중품까지 그녀는 조국에 바쳤다.

3년 후 나세르가 사망하자 4백만명의 조문객이 몰렸다, 당시로서는 조문객 최대의 기록이다.

움 쿨숨은 1972년 마지막 콘서트를 가진 뒤, 1975 2 3일 카이로병원에서 운명했다.

장례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장례식은 이틀이나 연기됐다.

모든 아랍국가의 조문객들이 카이로로 서로 오겠다고 연락이 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장례식날, 카이로 시내의 모든 도로는 엄청난 조문객들로 가득 메워 졌다.

묘지에 안장해야 했지만, 슬픔에 잠긴 군중들은 움 쿨숨의 관을 놔주지 않았다.

관을 빼앗은 군중들은 움 쿨숨이 생전에 자주 찿던 회교사원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묘지로 향했다.


엄청난 인파가 모였던 움 쿨숨의 장례식

 

움 쿨숨의 장례식은 4백만명이 훨씬 넘는 조문객들이 모였다.

나세르의 장례식보다 더많은 인파였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의 장례식으로는 역사상 최다 인파가 모인 기록이다.

움 쿨숨은 1953년 피부과 의사 하산 엘 헤프나위와 결혼, 슬하에 자녀는 없다.

그녀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가수로는 마리아 칼라스, 밥 딜런, 레드 제플린, 보노(U2)등이 있다.

 

글: 곽노은

*


https://www.youtube.com/watch?v=uckSKHHUBXE
= 엔타 오므리(Enta Omry) 움 쿨숨 콘서트 

https://www.youtube.com/watch?v=JA2lZ8YRY8c = 움 쿰숨의 장례식 장면 비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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