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우장춘의 고백: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2019.02.25

【우장춘의 고백: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은 조선말 무신이자 친일파인 우범선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원죄를 짊어진 가운데 일본에서는 조선인 조선에서는 민족반역자의 아들로 비난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장춘은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게 만드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복 후에도 식량난에 허덕이던 조국이 도움을 청하자 남은 일생을 조국을 위해서 희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죽는 날까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아버지의 잘못된 그림자를 지우고자 사력을 다했습니다. 제주 감귤 강원도 감자를 정착시키고 각종 채소의 품종개량 및 우리 땅에 맞도록 개량된 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조국의 농업에 이바지한 공로는 과일 품종의 정착과 대량 생산 기술 개발, 씨앗의 생명력 강화 개량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우장춘 박사가 사망하던 1958년 병상에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 박사는 운명을 묶은 끈을 풀고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서 이처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훌륭한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일본 정부는 감옥에 가두겠다는 협박을 했지만 그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심지어 가족을 위해 쓰라고 하면서 조국이 하사한 돈까지도 우량종자를 사는데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이 조국을 위한 그의 헌신은 그 무엇도 막아설 수 없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조국이 자신을 인정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훗날 우장춘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가운데 이렇게 얘기합니다. “길가의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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