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2회] 찬ㆍ반탁투쟁 혼란기에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2019.01.11

(신탁통치 찬반시위)


친일파 대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해방정국의 혼란 특히 남북분단과 외국군정 실시, 여기에 격렬한 찬반탁 투쟁으로 국론이 갈리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된 것은 친일파ㆍ부일협력자들에게는 하늘이 준 축복이었다. 8ㆍ15의 광복은 마땅히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분별되고, 친일파 청산의 가치(과제)가 엉뚱하게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투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정국의 이슈를 변질시킨 데는 친일세력의 농간이 크게 작용했지만, 결과적으로 독립운동가나 일반국민 할 것 없이 찬반탁투쟁으로 해방공간의 골든타임을 속절없이 날려 보내야 했다. 


그런 사이에 친일파들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막강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미군정의 실세가 되는가 하면 일본군 출신들은 군대나 경찰로 속속 들어가 신분세탁의 기회로 삼았다. 박정희도 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4개월여를 보내다가 서울에 올라와 1946년 9월 24일 3개월 과정의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육사의 전시인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문.)


조선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 폐지되자 같은 해 5월 1일 서울 태릉에 이 학교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경비대 간부를 양성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을 기해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되자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박정희가 입학한 조선경비사관학교의 입학생은 총 263명이었으며, 과거 중국군ㆍ만주군ㆍ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했던 경력자가 35명이었다. 생도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박정희는 보통 생도들보다 7~8세 많았지만, 1946년 12월 24일 교육과정을 불평 없이 마쳤다. 교육 내용은 일본식에 익숙해 있던 병사들에게 재식 교육과 정신교육을 통해 미국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만주에서 귀국하자마자 한국군에 합류했다. 아마 그가 직업군인으로서 훈련받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한국국방경비대에 합류한 것 같다. 그가 일본군이었는지 한국군이었는지는 문제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혹은 그 자신을 ‘해방된’ 조국에, 그리고 신생 한국군에 재결합시킴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국군에 합류했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귀태’들이 냉전을 기화로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부활하여, 마침내 분단국가 한국 내에서 권력의 핵심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치 ‘전범(戰犯)’이 된 기시 노부스케에게 미국과 소련의 대립 및 냉전이 그를 유폐의 나날에서 해방시켜준 절호의 기회였던 것처럼, 박정희에게도 냉전과 분단은 ‘친일파 군인’이라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줄 ‘뜻밖의 행운’이었다. 


박정희의 이와 같은 변신 행위는 기회주의적 처신임과 더불어 끊임없이 추구하는 권력욕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박정희)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로서 일제하 주구로서 해방 후 열두 번도 더 변신과 배신을 거듭하면서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철저하게 기회주의의 줄을 타는 재주를 부려왔다.” 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 8연대의 소대장으로 복무할 즈음 그의 가족에 큰 비극이 닥쳤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노동자들의 평화적인 파업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시작된 ‘대구사건’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다음날 노동자ㆍ학생ㆍ시민이 합세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10ㆍ1항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대구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하는 격렬한 시위는 성주ㆍ고령ㆍ영천ㆍ경산 등지로 번져나갔으며, 곧 이어 경남ㆍ전남ㆍ전북ㆍ강원 등 전국으로 퍼졌다. 


10ㆍ1항쟁의 와중에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가 경찰에 살해되었다. 


“박상희는 10ㆍ1항쟁 당시 선산군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무부장을 맡아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선산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 포용력을 발휘하여 군중의 폭도화를 방지함으로써 우익 유지들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충청도에서 지원나온 경찰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박상희와 박정희는 나이를 먹으면서 가정적ㆍ이념적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갈등이요, 생활의 곤궁함과 시대적 불확실성에서 오는 일시적 마찰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박상희는 박정희의 둘도 없는 정신적 지주였다. 집안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상희는 부모 형제에 대한 박정희의 모든 걱정을 덜어주는 존재였을 것이며, 그의 사망은 박정희의 고아 의식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가끔 노선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어렸을적부터 가장 많이 영향을 받고 의지했던 터이다. 이후 그의 좌익 참여는 형을 죽인 데 대한 복수심에서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정희는 1947년 9월 27일 대위로 승진한 뒤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10월 23일에 입교한 5기생때부터 이들을 가르쳤다. 5기생 정원은 420명으로 교육 기간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어났다. 


제1기생에서 4기생까지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군사경력자들이었는데, 5기생부터는 5년제 중학졸업 이상인 민간인을 공개모집으로 선발하였다. 경쟁률이 15:1에 이르렀다. 5기생의 약 3분의 2가 월남한 북한 출신 청년들이었다. 5기생 중에는 뒷날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혁명군 지휘소로 쓰였던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서울에 진입한 5사단의 채명신 사단장, 해병여단과 함께 한강을 건넌 공수단장 박치옥,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이 5기생이었다. 


사관학교는 박정희에게 미래에 소용이 될 인맥을 마련하여 주는 한편 그를 좌익 조직에 묶어 놓는 인맥도 제공하였다. 박정희가 5기생을 맡았을 때 사관학교 교장은 김백일 중령, 생도대장은 최창언 소령, 행정처장은 장도영 중령이었다. 


박정희는 1중대장, 그 아래 2구대장은 황택림 중위, 2중대장은 강창선 대위, 그 아래 2구대장은 김학림 대위였다. 박정희를 포함한 이 네 장교는 모두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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