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1회] ‘거지’로 귀국, 셋째형의 호된 질책

2019.01.09

민정이양 후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을 독립운동가라고 속인 박영만(朴永晩)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5ㆍ16 당시 혁검부장을 지내다 숙청당한 박창암을 찾아가 “여운형의 건국동맹 지하운동의 리더였던 박승환(朴昇煥:봉천6기, 만군 항공장교 출신)의 공적을 박 대통령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한마디로 말해 해방 후 평양에서 사망한 박승환의 공적을 박정희 것으로 조작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박씨를 찾아온 것은 이 작업을 위해서는 박승환과 함께 활동했던 박씨의 협조가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일언지하에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박영만은 1967년 2월 <광복군>이라는 두 권짜리 녹픽션을 발간하면서 박정희가 해방 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썼다. 그런데 정작 이 책에 등장한 신현준은 “해방 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증언했다. 


(박영만이 1967년에 펴낸 <광복군>)


박정희 일행은 1946년 4월 광복군 평진대대가 해산되자 5월초 톈진에서 미군 수송선 LCT편으로 출발하여 8일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5년여 만의 귀국이었지만 금의환향이 아닌 부끄러운 패잔병의 귀국이었다. 


이때 박정희 가문은 대부분 구미읍에 나와 살고 있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1938년 타계했고, 어머니 백남의와 아내 김호남은 딸 박재옥과 함께 박상희가 마련해준 구미역 근처 집에서 살았다. 박상희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고, 작은 누나 박재희도 남편 한정봉과 함께 옆집에서 살았다. 구미에 돌아온 박정희는 가족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형 박상희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것인데, 제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박정희는 아내와 어머니가 있는 집을 피해 작은 누나 박재희의 집을 근거지로 삼아 옛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등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정치의 계절이라 정당 활동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박정희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박상희는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이끌며 좌익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아의식이 강했던 박정희에게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처지는 부끄럽고 참담한 모습이였다. 그것도 사업이나 장사를 하다 실패한 ‘경제 거지’가 아닌 혈서를 써서 들어간 적국의 장교출신 ‘거지’였다. 아마 이 시기처럼 박정희가 ‘정체성의 위기’에서 고민했을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민족주의자 시각으로 볼 때 박정희는 ‘반역자’ 혹은 ‘부일협력자’로서 한국민족주의 또는 조국해방의 대의에 공헌하지 않은 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일본식민주의의 영속화를 위해 젊은 나날을 바쳤던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그는 외국지배하에서 훌륭한 삶과 직업을 꾸려간 매우 성공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자긍심은 뚜렷했다.


그는 일본제국이라는 체제 자체가 실패로 끝날 때까지 학생으로서, 사관생도로서, 나아가 일본체제내의 장교로서 삶 전체의 ‘승자’였다. 


하지만 외면적인 자긍심은 일본체제와 결부된 내적인 자책감과 짝을 이루었다. 일본제국의 붕괴 이전까지 그의 자긍심과 자책감은 그의 마음 속에 공존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일본군의 위력이 승승장구할 때는 자긍심이 내면의 자책감보다 우세했고 일본제국이 몰락할 때에는 자책감이 외면적인 자긍심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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