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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평생 불행한 뚱땡이 P씨

2019.12.04


          평생 불행한 뚱땡이 P氏


 P氏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 철부지 10대 소녀였던 P氏의 엄마가 가출하여 동네 불량소년들과 난잡한 혼거 생활을 하다 P氏를 임신했다. 누가 아기의 아빠인지도 모른 채 임신 중절시기를 놓쳐 P氏를 낳고 말았다. 아기는 P氏의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P氏 외할머니 역시 당시 30代 후반의 젊은 나이였고 이혼녀였는데 P氏 외할머니가 P氏를 데리고 외출하면 어느 누구도 할머니로 보지 않고 애기 엄마로 보았다. P氏의 엄마는 P氏를 낳고 나서도 철이 들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가출하기 일쑤였다. P氏 외할머니 역시 P氏 엄마를 미혼모로 낳았으니 탄생의 불행이 대물림된 셈이었다. 


 어쨌든 P氏는 할머니를 엄마로 부르며 자랐다. 할머니가 창피하다고 밖에서 절대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통에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이런 안정되지 못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P氏는 자랐다. 할머니는 차와 술을 함께 파는 테이블 4개 정도 규모의 이른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고 가출했다가 가끔 집에 놀러(?)오는 엄마도 그 가게에서 며칠씩 아르바이트를 뛰곤 했다. CAFE에서 엄마는 할머니를 ‘언니’로 불렀다. 모녀가 한 가게에서 일하는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집안의 족보는 참으로 묘해진 셈이다.(할머니 엄마, 엄마 이모)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 사람행세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할머니 엄마와 엄마 이모는 P氏를 열심히 학교에 보냈다. P氏는 그리 영특하지도 못했고 공부하려는 의지도 없어 그냥 ‘시계불알’ 마냥 학교와 집을 오갔고 학교가 파하고 나면 악동들과 어울렸다. 

 

 P氏가 사는 동네는 산동네였는데 예전에 철거민들이 밀려와 산등성이 이곳저곳에 판자를 덧대어 지은 판자촌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골목골목 사이는 사람하나 겨우 통과 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연탄 리어카도 통과하지 못하는지라 지게로 연탄을 지어 날라야 했으며 수도시설도 없는지라 산 아래 수돗물 가게에서 양동이로 물을 받아 물지게로 날라야하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화장실을 갖춘게 아니라 동네 공터에 크게 판자로 똥간을 만들어 공동 화장실로 이용했고 때가되면(배설시간) 동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똥 쌀 차례를 똥마려운 강아지들 마냥 낑낑대며 발을 동동 굴러가며 인상을 심각하게 찌푸린 채 기다리곤 했다. 조금만 길게 일을 보면 밖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저놈은 저속에서 뭐하는겨! 살림 차렸나? 뭐 딴 짓(?) 하는거 아녀?!” “아이고 기다리다 싸겄다! 대충 자르고(?) 빨리 못나와?” 이런저런 욕설을 먹어가며 오래 견딜 수 있는 강심장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산동네 사는 여자들은 대개가 변비였다. 여자들은 참고 참다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다 할머니 엄마가 미국 교포와 결혼하게 되면서 P氏도 지옥 같은 산동네를 탈출하여 이곳 천국 같은(?) LA에 오게 된다. 이때가 중학생 무렵이었다. LA에 와서도 P氏의 불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노상 밖으로만 나다니는 할머니 엄마는 일주일에 몇 번 얼굴 보기도 어려웠고 어린 P氏는 혼자 하루 세끼를 스스로 차려 먹어야 했으니 주로 먹는게 인스턴트식품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도 말도 잘 안 통하는데다 원체 성격도 소심해서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점점 체중이 불어 돼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통통한 편이었는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다 보니 그 스트레스를 음식을 통해 해결하고 고도비만에 이르렀다. 

 

 뚱땡이 P氏는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으니 영어도 전혀 늘지 않았다. 어쩌다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주위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으며 서툰 영어실력을 놀려댔다. 이러니 점점 더 벙어리가 되어갔다. 이곳 LA가 싫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래야 갈 방법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장을 따지 못했다. 출석일수도 부족했고 성적도 워낙 나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팔청춘이라 이성이 그리웠는데 여자 친구를 만날 수도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노상 방구석에 틀어 박혀 게임을 하며 야한 동영상을 보며 성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할머니 엄마가 P氏 방을 들여다보고 “야! 이 병신 같은 놈아! 이게 돼지우리지 사람이 사는 방이냐? 맨날 처박혀서 꼴에 남자라고 엉뚱한 짓거리(?)나하고 처먹고 자고 처먹고 자고 하니 니가 사람이냐? 이 돼지만도 못한 벌레 같은 새끼야!” 라고 하며 이런저런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댔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핏줄인자라 쫓아내지는 않았는데 할머니 엄마와 함께 사는 동거남 아저씨가(할머니 엄마는 미국에 와서 결혼했던 교포와 이혼하고 연하의 남성과 동거하는 중이었다.) P氏를 엄청 더 구박했다. “저런 놈을 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야? 지가 알아서 살라고 내쫓아야지!” 결국 P氏는 쫓겨났다. 다행히도 이웃집 사는 할머니가 이런 P氏를 가엽게 여겨 리커스토어 하는 아들가게에 소개시켜 주었고 P氏는 리커스토어에서 잡역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 LA 한인 타운에 있는 한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저렴한 가격에 입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고마운 이 옆집 할머니였다.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게으른 P氏는 리커에서도 늘 구박을 받았다. 하지만 멕시칸 보다도 훨씬 더 싼 임금을 주고(불법이다!) 쓸 수 있었기에 쫓아내지는 않았다 한다. 오갈 데 없는 P氏도 어쩔 도리가 없어 10여년 이상의 세월을 리커에서 구박받으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여년 전 필자가 찾아온 P氏의 사주팔자를 처음 보았을 때 한숨부터 나왔던 기억이 있다. “부모덕 없고 아버지와는 아주 일찍 연이 끊길 운명이며 돈복이나 처복, 자식 복까지 없고 앞으로도 살아갈 길이 아주 깜깜 합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말로 “앞으로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질 겁니다.” 라는 말로 상담해 줄 수밖에 없었고 참 답답했었다. 언제인가 저녁에 식당에 갔는데 P氏가 혼자 앉아 있었다. 필자도 마침 혼자였기에 P氏에게 저녁밥을 사주며 소주도 한 병 시켜주고 P氏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돈은 좀 벌수 있을까요?”, “제게 자식 운은 있나요?”, “제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필자는 금세 합석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필자는 절대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데 이때는 P氏가 너무 쓸쓸하고 안 되어 보여서 호의를 베풀었던 것인데 이렇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을 쏟아내니 무척이나 피곤해졌던 것이다. 필자에게 긍정적인 확실한 어떤 답도 얻지 못하자 P氏의 얼굴은 굳어졌고 자리는 어색하게 파했다. 언젠가 누구에게 들으니 지금도 P氏는 그 리커스토어에서 20년 가까이 되도록 여전히 주인의 구박을 받으며 하숙집과 리커를 오고간다 했다. 참 서글픈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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