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를 예견한 선조들!
옛 선비들 중에는 주역과 명리학의 대가들이 많았음은 필자가 그동안의 칼럼을 통해 누누이 이야기해 온 바라 논외(論外)로 치고 이를 실제 증명하는 일화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본다. 공주 봉황산 위에 큰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 공사를 하다가 산정(山頂)가까운 곳에서 큰 반석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돌에는 놀라웁게도 용연(龍淵)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이 저수지 공사가 있기 수백년 전에 누가 이곳이 저수지가 될 것을 알고 묻었을까? 이렇듯 옛 선조들 중에는 수백년 수천년 후를 내다본 이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시골마을 마을골짜기에는 그곳 특유의 지명이 있는바 이들 지명을 통해서도 선조들의 예지력을 알 수 있는 곳들이 수없이 많다. 옛날 어떤 산골 벽촌에 오경남이란 사람이 와서 그 마을 입구에다가 개학동문(開學洞門)이라 떡하니 써 붙이고 간 일이 있다. 이 산골벽촌은 생긴 이래 500년이 넘도록 글을 아는 이가 산 적이 없는 까막눈의 촌무지렁이 마을이었는데 당치않은 글귀였다. 허나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이 마을 입구 그 자리에 학교가 생겼고 이 학교를 졸업한 이들 중 여러 명이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개학동문이 되었다. 이렇듯 앞을 내다보는 이가 많았다. 경상도 어느 산골짜기 계곡이름이 구룡골 이었는데 그 산골짜기는 사람의 인적도 없고 어디를 살펴보아도 사람이 산 흔적이 없어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출토된 기왓장과 비석 등을 보니 수천년 전 이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수천년 후 구룡사라는 절이 신라시대 때 있었고 마을이 번성했던 곳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듯 우리나라 시골벽지 구석구석의 작은 골짜기 골짜기, 마을 이름조차 신비한 역사가 있고 유래가 있어 옛 조상들의 선견지명을 느끼게 한다.
옛적 서울에 수구문이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 수구문의 이름은 물이 빠져나가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뜻인데 이 수구문의 정식명칭은 광희문(光熙)이다. 헌데 우리나라 조선 마지막 두 임금의 연호가 광무(光武), 융희(隆熙)이다. 처음 한양에 나라의 수도가 건설될 당시 정해진 이름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이 이름을 지을 당시 벌써 물이 나가는 마지막 자리 즉 마지막 두 임금의 연호를 미리알고 수구문자리에 광희문이라는 문의 명칭을 지은 것이다. 이를 우연의 일치나 폄하하는 이도 있을것 같아 한 가지 예를 더들어 본다. 종묘의 문이름은 창엽문(蒼葉門)이다. 그리고 여기에 모셔진 군왕(君王)은 28위(位)이고 고종, 순종 두 분은 간(干)에 모셔졌다. 창(蒼)자와 엽(葉)자를 살펴보면 창은 이십(十+十)과 팔(八)과 임금 군(君)자의 합자(合字)임을 알 수 있다. 엽자 또한 이십((十+十와 十)과 팔(八)과 세(世)자로 되어있다. 그리고 종로는 정확히 28간반이다. 즉 처음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무학대사나 삼봉정도전 등은 이 나라가 28대까지 이어지다가 망할 것임을 미리알고 이렇게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우리에게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이다. 이분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 묻힐 자리를 정해놓고 그곳에 묻혔다. 그런데 그분의 증손자가 삼도감사(三道監司)를 지냈는데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의 묘역이 초라하고 지세도 별로인 듯하여 지리에 능한 유명한 지관을 동원하여 명당자리를 찾은 뒤 이곳에 모시려고 (이장)개묘를 해보니 안에서 빗돌이 하나 나왔다. 그 빗돌에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 (某年 某月 某日 某時)에 불초손(不草孫) 이 묘를 팔 것이며 개봉축(改封築)하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깜짝 놀란 증손자는 죄송스런 마음에 선산선영에 자신이 묻힐 자격이 없다고 한 뒤 토정선생의 묘 밑에다 자신의 묘를 자그마하게 섰고 지금도 증조할아버지 바로 아래 잠들어있다 한다. 무학대사가 약 500년 후에 있을 조선의 운명을 예견했듯이 약 800년 후에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살피러 다닐 것을 미리알고 이를 예견한 이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에게 조선의 수도(首都)를 정하게 하자 무학은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로부터 맥(脈)을 찾아서 만경(萬景)에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비석봉[碑峰]에 다다르니 글씨가 새겨진 큰돌이 보였다. 그 돌에 쓰여진 글씨를 자세히 보니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리라’는 뜻의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여섯 글자였다. 이는 곧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 국사가 세운 것이다. 무학은 이에 길을 바꾸어 다시 만경으로부터 정남쪽으로 걸어 가다가 백악산(白岳山) 아래 이르러 세 개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들[坪]을 이룬 것을 보고 마침내 궁궐터를 정한다. 그곳은 곧 고려 때 조선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오얏을 심은 곳이다. 바깥성[外城] 쌓을 자리를 놓고 무학과 선비들의 의견이 엇갈려 성의둘레와 거리[遠近]등을 결정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밤에 천하를 모두 뒤덮기라도 하려는 듯 많은 눈이 내려 안으로는 깎이고 밖으로는 계속 쌓여 성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태조는 이에 명령을 내려 눈을 쫓아서 성을 쌓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이다.
이렇듯 옛 선조들 중에 선견지명이 매우 뛰어난 이들이 많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작은 잔재주가 아니요, 깊은 공부와 수련을 통해 영안(靈眼)이 열렸기에 가능한 일이였던 것이다. 필자 또한 이런 분들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하여도 최소한의 앞길은 예견하여 필자를 찾는 분들에게 작은 안내서를 제시할 수 있어 그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오늘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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