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둥이 L씨
오로지 어린 두 남매만을 위해 평생을 바쳐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L씨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또 어떤 때에는 몇 년에 한차례 필자를 찾는 오랜 고객이시다. L씨는 한국에서 자신의 표현대로 ‘양복쟁이’였다고 한다. 가난한 서울 변두리 뚝방 촌에서 태어나 학업은 고사하고 어릴 때부터 이집 저집 전전하며 잔심부름꾼 노릇을 하다 그나마 운 좋게도 비바람 피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양복점 시다로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월급은 없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어깨 너머로 기술까지 배울 수 있으니 이런 고급업종에는 들어오려는 꼬마들이 줄을 섰으나 운 좋게도 이런 기회가 L씨에게 돌아온 것이다. 3년 정도 지나자 주인아저씨가 용돈 정도의 돈을 월급명목으로 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복점 꼬마가 아닌 엄연한 ‘시다’가 된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가위와 치수를 재는 줄을 잡을 수 있었다. L씨의 근면․성실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L씨는 자신의 착한 심성대로 작은 돈이지만 한 푼도 안 쓰고 어린 동생들을 위해 집에 꼬박꼬박 부쳐드렸다. 언젠가 주인아저씨가 낡았다고 버리는 구두를 주어와 구두수리 집에서 수리해서 신은 것을 주인아저씨가 보고 “작은 돈이지만 주는 월급은 어쩌고 그 궁상을 떠는게냐?” 하고 핀잔을 주다 사연을 듣고는 L씨를 더욱 기특히 여겼다. 주인아저씨에게는 ‘영희’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이가 그야말로 아주 ‘날나리’였다. 엄마 없이 홀애비 밑에서 키워온 외동딸이라고 가여운 마음에 ‘오냐오냐’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애비가 주는 넉넉한 용돈으로 남자애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주 일과였다.
주인집 아저씨는 일류기술자여서 그 양복점에는 양복을 지으려는 손님이 줄을 이었고, 아주 오래전에 가봉(양복을 짓기 위해 몸의 치수를 재는것)을 해야 때맞춰 양복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어 L씨 외에도 아저씨 바로 밑의 보조기술자 2명, L씨같은 시다가 L씨 외에도 3명이나 더 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신임을 받은 것은 L씨였다. ‘영희’는 중학교 때 이미 한 번 임신을 했다가 중절한 경험이 있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가출을 했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는데 배가 너무 불러있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자퇴하고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쉬~ 쉬~ 하는 속에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주인아저씨 입장에서야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자식이지만 자신의 손자가 왜 아깝지 않았겠느냐 마는 어린 딸의 장래를 위해 그런 모진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세월은 흘렀고, 세태의 변화에 따라 기성복 시대가 되면서 아저씨의 가게도 서서히 쇠퇴해갔다. 이제는 그 많던 직원도 다 그만두고 주인아저씨와 L씨 두 사람만 남았다. 이때 아저씨가 직장암으로 발병사실을 안지 두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한다. 이제 그 집에는 ‘영희’와 L씨만 살게 되었다. 이때는 L씨도 일급 기술자였고 영희는 엄연히 가게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처음 둘은 주인과 기술자의 관계였지만 쇠퇴한 가게야 L씨가 떠나면 완전히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L씨는 주인아저씨의 유언에 따라 가게를 지켜나간다. 이러던 중 어느 날 밤 끼 많은 ‘영희’가 L씨를 덮치면서 둘은 부부 아닌 부부가 되어 살게된다.
‘영희’는 L씨와의 사이에 처음 딸을 낳더니 두 번째 고추달린 아들을 낳았다. L씨는 자신이 아빠가 된 것이 너무 신기했고, 이런 보물을 안겨준 ‘영희’가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디한번 맘 놓고 놀러 다녀보지도 못했고 성격이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 성격이다 보니 이성과 사귈 엄두도 못냈고, 경제적 형편도 그리 못되는 판에 적극적 성격에 끼 많은 ‘영희’가 자신을 덮쳐준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던 차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런 자식까지 낳아주니 ‘영희’는 L씨에게 여왕이었다. 아무튼 이 집이나 이 가게도 영희꺼니 여왕은 여왕인 셈이었다. 비록 맞춤양복 시대가 쇠퇴했어도 L씨가 워낙 성실하고 꼼꼼하게 일을 하는 것이 소문이나 그런대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갈 수는 있었는데 ‘영희’가 사단이었다.
어린남매 양육에는 관심이 없고 반반한 동네 건달 놈들과 어울려 술 처먹고 샛서방질하고 그것도 싫증나면 노름질하고 어린 총각놈과 바람이 나서 전국 유람 떠나고 등등 하는 짓이 개차반이었다. 부처님 반토막 같은 L씨이지만 이런 영희년(이쯤부터는 욕을 해줘야한다)의 망동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야단을 치니 어랍쇼? 영희년, 잘됐다는 듯이 니새끼(?)들 데리고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지랄 염병을 떨었다 한다. 하두 사람 같지 않은 년이니 상대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L씨, 남매 데리고 집을 나섰다. 어린남매 데리고 이런저런 고생을 하다 옛날 주인아저씨 가게에서 보조 기사로 일하던 최씨와 연락이 닿았는데 자신은 오래전에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고 잠깐 한국에 다니러왔는데 L씨에게 미국에 와서 자신과 함께 일을 해보자고 권유한다.
이래저래 한국이 싫던 L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미국에 남매 데리고 오게 된다. 최씨는 자바시장에서 의류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 미국에는 한국처럼 한사람이 디자인하고 패턴을 뜨고, 옷을 만드는게 아니라 디자이너, 패턴사, 재단 등등 옷 만드는 일이 분야별로 나눠져 있어 L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옷을 지어낼 수 있는 기술자는 드물고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L씨는 이곳 미국에 오는 첫날부터 일을 시작한다. 미련스럽게도 성실한 L씨는 이곳 미국에서도 그 특유의 끈기와 성실성으로 인정받게 된다. 필자가 L씨에게 미련둥이라는 별명을 부친 것은 그의 우직한 성실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였다. 필자가 언젠가 재혼 이야기를 꺼내자 손사례를 치며 “아이고 그런 말씀 꺼내지도 마십시요! 애들 엄마한테 질려서 여자라면 신물이 다 납니다. 그리고 새엄마가 들어와서 우리 애들이 ‘콩쥐’신세가 되면 어떡하라구요? 그냥 이렇게 살다 갈랍니다!” 영희년에게 어지간히 덴 모양이다. L씨와 그의 두 남매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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