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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무술고수도 사람이 무섭다.

2019.04.01


무술고수도 사람이 무섭다.   


  박대양씨는 정확한 자기 나이도 모르고 부모.형제에 대한 기억도 없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원혜상인이라는 스님에 의해 길러졌다는 것뿐이다. 원혜상인은 도의 경지가 무척이나 높은 분으로 최근세에 무예분야는 물론 인력과 수양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 도력이 높은 소수의 승려들에 의해서만 구전으로 알려져 있던 분이다. 원혜상인은 무공을 거의 쓰지 않는 분이지만 한번 쓰면 대단한 폭팔력을 보였다. 박대양씨의 목격담에 의하면 스님이 한그루의 나무에 솔장법이란 무술을 쓰면 나무가 벼락을 맞은 듯 재가 되고 쌀 한가마니 정도는 공깃돌 가지고 놀 듯 마음대로 다루었으며 또 집채만 한 바위를 축구공 같이 발로 차버리면 바위가 연탄재같이 산산조각 부서져 버린다 했다. 스님은 옛날 도사들이 쓰던 축지법을 썼고 수 십 미터의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는 경공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지만 엄연한 사실 이였다 한다. 


원혜상인의 나이도 신비함을 주는데 언젠가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지 스님이 원혜상인에게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원혜상인 스님이 스님보다 훨씬 젊으신데 어떻게 할아버지스님이 스님을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부르세요?”라고 묻자 노스님 왈 “원혜상인스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미 할아버지 스님 이였단다.”라는 답을 했다한다. 박대양씨가 산을 떠날 때인 스무 살 무렵 원혜상인스님은 159세였으며 3년 뒤 돌아가셨다. 박대양씨는 처음 몇 년 동안에는 땔감나무 해오는 것과 물 긷는 일만을 시켰지 일체 무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기초체력을 길러 주려는 깊은 뜻 이였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살고 있던 설악산 깊은 산골짜기에서 몇 번이나 도망쳤지만 스님은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쫒아와 잡아갔다. 하여 탈출을 포기하자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서서 한 가지 동작을 하고서 참선을 시켰다. 


아랫배로 호흡을 시켜 입선을 하는 방법인데 처음에는 몸이 고통스러워 매우 어려웠지만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무심의 마음이 되어 무념무상에 젖어 고통자체도 잊어버리게 되고 하루 종일 한 자세로 서있어도 자신이 서있는지 앉아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가 됐다. 식사는 거의 생식을 했고 영양보충을 위해 가끔 마른 육포를 찢어먹기도 했다. 거주는 동굴에서 했으며 원혜상인이 사오십리쯤 가야 있는 산골마을에 가서 그동안 캐 놓은 약초 등을 주고 쌀가마니를 가져 오기도 했는데 쌀 한가마니를 한 손에 접시 들고 오듯 했다한다. 원혜상인으로부터 기천문(氣天門)을 전수한 박대양씨는 주민등록에는 1957년생을 되어있지만 이는 양부모가 호적에 올린 단순한 숫자일 뿐 실제로는 자신의 나이를 모른다. 철이 들고 보니 자신이 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핏덩이 때부터 설악산 태백산 근처 깊은 산중에서 스님 손에 자랐다. 기천문의 유래는 단군이래 내려오던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으로 예부터 구전으로만 제자가 제자를 통해 전달된 가르침이다. 


우리역사 속에서 기천은 신라시대이후 세상에서는 정통무예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 이유는 배우기도 어렵고 또 선의 일종이기 때문에 주로 산중에서 개인 간에 은밀히 전파됐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흐름이 이어지다가 조선조 중기부터는 태백산맥으로 옮겨지며 현대에 이르러서 설악산 주변의 깊은 산중에서 원혜상인스님으로부터 기천의 마지막 전인인 박대양씨에게 이어졌고 박대양씨가 하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에 내려와서 낭인생활을 하던 중 부산의 모관장이 시키는 대로 주변의 무술고수들과 일합을 겨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장이 겨우 1m 54cm, 체중 40kg의 그야말로 쥐톨만한 아담한 체구의 박대양씨에게 무술고수들이 나가떨어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실제로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부산의 폭력조직 칠성파 조직원과 충돌을 일으켜 그를 메다꽂자 부산 칠성파에서는 박대양을 잡기위해 전조직원을 동원했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칠성파 조직원들과 한바탕 붙었는데 수 십 명을 때려 눕혀도 계속 떼거지로 무기를 들고 덤벼들자 박대양은 사세가 불리함을 깨달고 냅다 달려 도망갔는데 뒤를 쫒던 칠성파식구들이 깜짝 놀랐다 한다. 박대양은 모래 위를 쏜살같이 뛰어서 도망갔는데 모래밭에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아서였다. 


무협지에 <탑설무흔>이라는 비법이 있는바 ‘눈 위를 걸어도 흔적이 없다.’는 비법인데 박대양이 이를 구사한 것이다. 몸이 가벼운 측면도 있지만 기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눈 위를 걸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내공훈련과 기 훈련을 통해 연마가 가능한 기술이라 한다. 좋은 무예를 쓸데없이 방랑에 낭비하여 밥만 사주면 어느 누구하고라도 일합을 겨루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싸움판에 나가 싸워 이겨도 생활은 극빈자 생활 이였다. 먹을 게 없어 매일 물만 마시고 채소를 데쳐 먹는 빈곤한 생활 속에 우유배달도 해보고 거지들과 함께 생활도 해보았다. 그러면서도 깡패를 만나면 상대방이 3명이든 5명이든 닥치는대로 해치웠다. 한번은 하산해서 활동하던 1972년경 행동거지가 수상하다고 주민들이 신고를 하는 바람에 간첩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출생지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고장의 지리도 모르니 고스란히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경찰 진술에서 자신의 스승이 원혜상인이며 언젠가 탄허스님이라는 분이 스승님에게 삼배(三拜)를 올렸다는 진술을 하자 경찰이 탄허스님에게 연락을 했고 탄허스님이 원혜상인스님을 잘 알고 박대양씨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증서를 써주어 석방될 수 있었다. 


박대양씨의 칼 쓰는 솜씨도 일가를 이룰 정도였고 기를 써서 구름을 끌어당겨 위치를 바꿔 놓기도 했으며 산속 나무들의 윗가지들만 밟고 뛰어다니기도 하는 경공술을 보여 목격자들을 경악 시킨 바도 있다. 한번은 박대양씨가 호두만한 쇠구슬을 서예액자에 던졌는데 유리액자는 깨지지 않고 쇠구슬만 산산 조각나는 시범도 보였다. 하지만 기천문의 근본은 이런 신비한 무술에 있지 않다. 기천문은 기를 뚫는 일을 하고 막힌 기를 세워서 건강 특히 마음의 건강을 찾게 해주는 심신 수련법이다. 기천수련을 통해 암 환자나 척추장애자도 치료된바 있다.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교포의 아들이 장애자였는데 이 아이를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치료해 주어 거의 완치를 시켜 주었는데 불법의료 행위로 고발되는 수모도 겪었다. 수고했다고 돈을 주어 받았는데 이것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원혜상인스님은 이런 전통의술에 능하셨지만 많은 이를 치료해 주시면서도 이것을 한 번도 쌀과 바꿔먹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수를 한 것이지요!” 박대양씨의 술회다. 박대양씨는 기천문의 전수자 이지만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떤 싸움패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 만나는 것이 최고로 무섭습니다.” 이 말은 그가 속세에 내려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음을 증명한다.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다. 아무튼 박대양씨 팔자 속에는 돈복과 인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빈곤함 속에서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자료제공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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