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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이준 열사 기념관 (헤이그)

2018.01.03

이준 열사 기념관



1978년에 발간된 네덜란드 연감에는 ‘1907년 헤이그에서 한 한국인의 비극’ 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 한국인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와 국권 회복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렸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


그 분이 바로, 헤이그에서 순국하신 이준 열사이다.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올라 가는 나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100년 전, 나라잃은 슬픔을 안고 헤이그로 오셨던 만인의 영웅.
그는 꺼져가는 대한제국의 정의를 살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두 분과 함께 고군분투하셨지만,

슬프게도 대쪽같은 그의 의지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꺽이고 만다.

“독일과 벨기에 등지에서 교포들이 찾아와 위대한 선열의 역사를 보고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이기항선생과 송창주 관장 부부.
지난 20년 동안 이준 열사 기념관을 세우고 지켜온 분들이다.
이기항 선생(81세)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주재원으로
네덜란드에 왔다 암스테르담에 눌러 앉은 사업가.
아내인 송창주 관장(78세)은 이화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원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이곳을 찿은 한국인들은 이준 열사에 대한 송창주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장군을 포함한 군인들은 흐트러지지 않는 차렷 자세로,
민족사관고등학교등 젊은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감정이 복바쳐 오른 사람은 무릎 꿇고 묵묵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송창주 관장


1905년 7월 29일,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Taft-Katsura Agreement) 밀약이 맺어졌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강대국간의 비밀협정이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고 있던 고종은 1905년 10월,
미국인 헐버트(H. B. Hulbert)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헐버트를 만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바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기념촬영한 일본군들


일본군은 궁궐 내외에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가 감돈다.

이토는 모든 대신들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 했다.
결국, 다섯 명의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한다.
곧이어, 일본은 통감부와 이사청을 두어 한국의 모든 내정을 장악했다.

이에, 영국 서리공사 이한응(李漢應)은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임지에서 음독자결했다.
민영환(閔泳煥)도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한다.
이들외에도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전 참정(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 이상상(李相尙),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등이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했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이상설(李相卨), 부사 이준(李儁) , 부사 이위종(李瑋鍾)을
평화화의 특사로 내락하고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을 내려 주었다.



이준(李儁) 열사


고종황제의 밀명을 품고 서울을 떠난 이준 열사는 이상설, 이위종 특사와 함께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르렀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자,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할 호소문을 만들었다.

호소문에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
국제법상 무효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고 말씀하는, 이준 열사의 유훈


1907년 6월 30일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는 대한제국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 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평화회의보는 영국의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가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윌리엄 스테드는1907년 7월 5일,
이위종과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기자협회 연설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활동 20일 후인 1907년 7월 14일.
드용 호텔(현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이준 열사는 분사(憤死)하신다.
이준 열사의 죽음은 홧병에 의한 분사설,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또는 자살설과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호텔방과 그의 복제된 유품들


이준 열사 순국 이 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켰다.

그리고는,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함께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 7개항을 내용으로 한 정미7조약(일명 한일 신협약)을 체결한다.

일본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 특사에게는 사형,
이준 열사와 이위종 참서관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선고한다.

이후 통감부에 의한 차관정치가 시행되었고 4년 후인 1910년,
한일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국체(國體)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상설(李相卨) 정사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이상설 선생은, 미국,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을 돌며 독립운동을 펼치시다,
니콜리스크에서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는 유언을 남겼다.



최초의 주러시아 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과 이위종 부사



이위종 특사는 대한제국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이범진) 때문에 미국에서 소년 시절,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중등학교와 군사학교를 마쳐 3개국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헤이그 현지에서는 대한제국 왕자로 소개되어 모든 회의와,
기자회견에서 주역을 담당했다.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의 일은 아직까지 잘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에, 아버지 이범진 공사는 자결하고, 형 이기종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으로 객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대한의군 참모중장)에 의해 사살됐다.


여행팁: 입장료 5유로, 평일은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토요일은 오전 11시 – 오후 4시. 일요일은 문을 닫는다.
http://yijunpeacemuseum.org/ (이준열사 기념관 웹사이트)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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