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믿음이 한국사회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45년 해방이후,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미군정당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의 사이에서 미군역시 오락가락하던 시기라 피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는어지러웠다. 그 시기 굶어죽는 자가 30만명이상이었으며 정국이 안정되지 않는 미개국수준의 사회상이였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일자리 없는 혼란의시기에 또래들끼리 몰려다니면 그냥 건달패거리로 시장상인들에게 세금이나 걷어내는 그러한 미개국수준의 사회였다.
당장 배고파죽는대 무슨 민주주의? 그나마 이승만 초대가 선정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유지하려 혼신의 힘을 다하였으나, 초대는 미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한국에 그리 친분 두터운 사람이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능력없는 이기붕 잘못만났고, 이기붕은 결국 동대문패거리끌어들여 사사오입개헌, 3·15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결국 3.15부정이 도화선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벌어졌으며, 내무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하여,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사오입관련: 1954년 11월 17일 개헌안을 둘러싸고 민의원 표결이 이루어졌다. 재적 203명 중 찬성표는 135표였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재적인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136표 이상) 하는데, 135표는 한 표가 부족한 수치였다. 따라서 국회는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국회의 선포는 부결에서 가결로 번복되었다. 이 때 동원된 것이 사사오입논리였던 것이다. 개헌안은 결국 통과 되었고, 이승만은 계속해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시위학생들이 경무대까지 쳐들어왔으며, 그때까지도 이승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다가 총소리기 요란하자 그때서야 '학생들이 경무대까지 쳐들어왔다' 다급한말을듣고 부랴부랴 하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4.19사태는 이승만만 탓해서는 안 되는 과거사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도 중대한 물증! 오스트리아, 미국 등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명확한 물증이 제시될 경우, 선거 전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명령한 판례가 있다. 국내에서도 이 정도의 증거가 공식적으로 제출된다면, 단순한 의혹이 아닌 실질적 부정선거 증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번 사안은 대한민국 선거 신뢰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이라며 “선관위는 해당 영상에 도대체 왜 특정 후보에 기표한 투표지가 연속적으로 수백번 수천번 나오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fntoday.co.kr)
분명한것은 대한민국 법치가 살아있어 "작금의 6.3사전 선거는무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