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89회] 장준하 암살의 배경과 배후

2020.09.09

박정희에게 정치적 라이벌이 김대중과 김영삼이었다면 사상적ㆍ이념적 라이벌은 장준하였다. 


하나는 일본군 중위, 다른 하나는 광복군 대위로 해방을 맞았다. 장준하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환국한 후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장면 정부에서 국토건설본부장직을 맡았고, 박정희는 패잔병으로 귀국하여 국군에 들어가 한때 남로당 사건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승진하여 육군소장이 되었다. 


1961년 박정희가 5ㆍ16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두 사람은 역사현장에서 맞부딪히게 된다. 박정희는 명실상부한 군정의 실권자로서 반공국시, 구악척결, 경제건설, 세대교체 등을 내걸고 국정을 전단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한다. 1961년 6월호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5ㆍ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면서 군은 최단시일 내에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장준하가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것은 <사상계> 7월호 함석헌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서이다. 함석헌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썼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각오를 하고 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박정희와 일전을 각오한 도전인 셈이다. 쿠데타 이후 언론인ㆍ학자ㆍ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주눅이 들어 있던 판에 장준하가 <사상계>와 함석헌을 통해 5ㆍ16비판의 물꼬를 튼 것이다. 


군사정부는 즉각 함석헌을 구속하고 장준하를 입건하였다. 그래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필봉을 멈추지 않았다. 군정기간 동안 <사상계>는 5ㆍ16쿠데타 비판의 전위지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정치적인 번의를 거듭하면서 어용 지식인, 언론인, 일부 구정치인들을 끌어들이고, 사상계 참여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5ㆍ16 불가피성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권력연장을 위해서는 5ㆍ16의 합리화 작업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장준하씨가 함석헌옹과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모습


박정희는 5ㆍ16의 불가피성을 다음과 같이 합리화시킨다.


<한국군사혁명사>(군사혁명편찬위원회)를 통해서 다섯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 용공조직 및 단체의 출현

둘째, 경제적 위기

셋째, 사회적 무질서와 국민도덕의 퇴폐

넷째, 고질적인 정치적 병폐

다섯째, 군부의 성장과 군사혁명의 불가피성


이에 대해 장준하는 <사상계> 1964년 5월호 권두언 "유산된 혁명 3년"을 통해 5ㆍ16의 불가론을 제기한다.


5ㆍ16 세 돌을 맞는 오늘 이 나라의 저류에서 이글거리는 위기의 지열은 자유당 지배 말기 징상(徵狀)과 다름이 없는 한계점에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 부패ㆍ부정ㆍ무능에 있어서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신악이 구악보다 그 방식이 교묘하고 그 스케일이 오히려 대담하게도 규모가 커졌다는 여론에 접할 때 이 민국을 위해 너무 애달픈 감을 금할 길이 없다. 국민혁명을 구두선으로 외치던 5월혁명이 세 돌을 경과하는 동안에 집권욕과 물욕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점차 민심을 등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을 실로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심히 슬프고도 위태로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5ㆍ16에 대한 쿠데타 주역과 비판자의 관점은 이토록 대척점을 이루었다. 박정희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그것도 비밀리에 추진했다.


장준하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데 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가이익을 져버리고 국민의 자존심을 손상하면서 진행하는 굴욕회담에 대해서는 도저히 묵과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감정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굴욕회담의 강행에 나섰고, 장준하는 혼신의 저지투쟁으로 맞섰다. 1965년 재야의 조국수호협의회에 참가한 것을 시발로 한일조약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사상계>의 긴급증간호를 두 차례나 발간하면서 굴욕회담의 저지투쟁에 앞장섰다. 1964년과 1965년 2회에 걸쳐 발행한 <사상계> 긴급 증간호는 한ㆍ일 굴욕회담 저지의 이념과 행동의 지침서가 되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ㆍ시민의 시위를 통제하기 위한 계엄령을 서울지역에 선포했다. 그리고 다시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거세게 일어나자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군사력을 동원하면서까지 굴욕협상을 체결하고 비준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상계> 지면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장준하는 권력의 물리력 앞에 한 자루 붓으로 대항의 길을 찾았다. 1965년 9월호 권두언은 이렇게 항변한다.


이제 한ㆍ일수교라는 미명 아래 집정자의 부정과 그 폭력은 최고에 달하고 있다. 배반자의 무리가 도리어 가상할 만한 군상으로 통용되고 매국하는 자가 스스로 애국하는 자라고 불러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강산을 흑암으로 뒤덮은 채 그들은 득의양양하고 이에 발분하는 양식의 소리는 너무나 가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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