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게 정치적 라이벌이 김대중과 김영삼이었다면 사상적ㆍ이념적 라이벌은 장준하였다. 하나는 일본군 중위, 다른 하나는 광복군 대위로 해방을 맞았다. 장준하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환국한 후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장면 정부에서 국토건설본부장직을 맡았고, 박정희는 패잔병으로 귀국하여 국군에 들어가 한때 남로당 사건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승진하여 육군소장이 되었다. 1961년 박정희가 5ㆍ16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두 사람은 역사현장에서 맞부딪히게 된다. 박정희는 명실상부한 군정의 실권자로서 반공국시, 구악척결, 경제건설, 세대교체 등을 내걸고 국정을 전단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한다. 1961년 6월호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5ㆍ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면서 군은 최단시일 내에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장준하가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것은 <사상계> 7월호 함석헌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서이다. 함석헌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썼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각오를 하고 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박정희와 일전을 각오한 도전인 셈이다. 쿠데타 이후 언론인ㆍ학자ㆍ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주눅이 들어 있던 판에 장준하가 <사상계>와 함석헌을 통해 5ㆍ16비판의 물꼬를 튼 것이다. 군사정부는 즉각 함석헌을 구속하고 장준하를 입건하였다. 그래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필봉을 멈추지 않았다. 군정기간 동안 <사상계>는 5ㆍ16쿠데타 비판의 전위지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정치적인 번의를 거듭하면서 어용 지식인, 언론인, 일부 구정치인들을 끌어들이고, 사상계 참여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5ㆍ16 불가피성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권력연장을 위해서는 5ㆍ16의 합리화 작업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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