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88회] ‘속았다’는 문세광의 최후진술

2020.09.09

                             1974년 10월 14일 재판을 받고 있는 문세광.


문세광은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집행 직전, 사형수에 대한 관례대로 구치소 소장이 “최후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 말이 일본어로 통역되는 순간 문세광은 창백해진 얼굴로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며 통역에게 일본말로 되풀이하여 물었다.


“그 말뜻은……지금부터 집행하는 겁니까? 사형집행하는 겁니까?”라고 울부짖었고, 통역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문은 시종 울면서 약 10분간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외국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아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 대통령께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여사와 죽은 분(식장에서 사망한 여고생)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


 

                     총에 맞고 사망한 장봉화 양,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렇게 하여 얼마 후 문세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문세광의 사형집행 지휘검사로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을 지켜보았던 조태형 변호사는 “문세광의 최후진술 내용이나 진술할 때의 태도로 봐서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뉘우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밝힌 바 있다. 


조 변호사는 “문세광이 진범이 아니거나, 조금이라도 억울한 점이 있었다면 적어도 죽음을 눈앞에 둔 최후진술에서는 최소한 그에 대한 항의나 변명을 했을 것인데 후회, 참회의 눈물로 일관한 최후진술의 자세로 미루어 문세광이 육여사 저격의 진범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또 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총지휘했던 김일두 변호사는 “이제 와서 문세광이 육여사를 쏜 진범이 아니네 하고 얘기하는 것 자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당시 수사책임자로서 직접 수사해본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눈물로 일관된 최후진술 내용으로 봐도 그가 진범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김일두 변호사는 “만일 문세광이 진범이 아니었다면 내가 처형당하겠다”고까지 말하며 그 사건에 대한 수사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많은 의문과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녀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런 면은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저격사건에서 육영수가 결국 남편인 박정희 대신 희생된 격이어서 더욱 증폭됐다. 아직 젊고 우아했던 그녀가 총탄에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그 죽음은 진정 비극적이고 애처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련꽃’이라는 이미지도 이렇게 부여된 것일 테다.


8월 19일에 열린 국민장이야말로 유신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아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대중과 특히 많은 여성들이 육영수와 박정희의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날, 박정희식 파시즘적 통치와 반공개발주의는 다른 함의와 후과를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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