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91회] 남북회담대표 제의 거부한 장준하

2020.09.14
 

7ㆍ4공동성명을 전후하여 박정희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장준하에게 남북회담의 대표직을 맡아 줄 것, 국가공로상ㆍ연금지급 등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장준하는 민주정부가 수립되면 몰라도 박정권에서는 일체의 공직이나 연금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제의와 거부 또한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장준하가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건강의 악화로 석방된 것은 1974년 12월이다. 감옥에서 협심증이 악화되어 더 이상 수형생활을 하기 어려워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것이다.


장준하 석방 무렵의 정국은 긴급조치의 위력이 절정에 이르고, 이에 맞선 저항세력의 투쟁도 치열하여 정국은 최악의 상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감옥은 양심수들로 가득찼다.


이 시기 박정희는 여러 가지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밖으로는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사게 되었고, 가정적으로는 8ㆍ15행사장에서 문세광의 저격으로 자신은 피격을 모면하였으나 부인 육영수가 총상을 입고 운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생ㆍ재야ㆍ종교ㆍ지식인들은 긴급조치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유신 저항운동에 나섰으며, 인권문제 등으로 카터 미국정부와 외교마찰을 빚고 있었다.



1년여 만에 출감한 장준하는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민주회복투쟁의 대열에 돌아왔다. 1975년 1월 8일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면서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감옥에서 더욱 날이 선 장준하의 민주회복의 의지는 다시 박정희의 심장을 향해 던져졌다. 


장준하는 이 서한에서 “5ㆍ16 군사정변 이후 귀하의 정치노선에 계속 비판적이었던 본인도 벅찬 감격으로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가 기필코 성공되기를 기원하면서 귀하가 취한 역사적 결단에 찬사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전제, “민주주의만이 북과 대결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적 지주요, 도덕적 바탕”이라면서 다음의 6개항의 실천을 촉구했다.


1.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영예롭게 스스로 택함은 물론, 앞으로 올 모든 집권자들이 규범으로 삼게 할 것. 


2.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무조건 석방할 것.


3. 학원ㆍ종교ㆍ언론사찰을 즉각 중지하고 야비한 정보정치의 수법인 이간ㆍ분열공작으로 더 이상 불신풍조와 상호배신 행위의 습성을 우리 사회에 조장하지 말 것. 


4. 자유언론(특히 일제 이래 한국언론의 수난의 여왕이요, 민족지로서 연면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ㅇㅇ일보, ㅇㅇ방송 등)에 대한 비열하고 음흉한 탄압정책을 즉시 철회할 것.


5. 정부의 경제적 실책으로 가중되는 당면한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실현할 것. 


6.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이상적이고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수립ㆍ추진하되 민중의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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