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90회] ‘밀수왕초’ 비판에 ‘국가원수 모독’ 보복

2020.09.12

                          사카린밀수사건으로 인해 사퇴 기자회견하는 삼성재벌 이병철 대표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정경유착의 한 상징으로 단정한 야당과 학생들은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10월 15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중당 주최 재벌밀수 규탄대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하여 “밀수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공격하면서 박 대통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박정권은 즉각 장준하를 수감했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3개월간의 옥고를 겪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투옥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장준하는 박정희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그런 상대는 아니었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하는 등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명성을 가진 언론인이다. 박정희는 1개월 만에 그를 석방하기에 이른다. 


석방된 장준하는 1967년 재야 4자회담을 주선하여 야당통합을 달성하고 신민당에 입당, 박정희의 재선을 막기 위한 정치일선에 나선다. 


이 무렵 박정희는 눈엣가시와 같았던 <사상계> 발행에 온갖 방해공작을 펴서, 이 잡지는 창간 이래 최악의 경영난에 빠졌다. 세무사찰을 비롯하여 지방서점에 압력을 넣어, 서가에 진열도 못하고 반품토록 만들었다.


장준하가 성격에 맞지도 않으면서 정계에 투신한 원인의 하나는 정부의 방해로 인한 언론투쟁의 한계를 느껴, 정치투쟁을 통한 정권교체라는 방법론상의 변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행동하는 야당인’으로 변신한 장준하는 1967년 4월 대통령선거 유세를 통해 다시 박정희 비판에 열을 올린다. 박정희를 월남전에 한국청년의 피를 파는 매혈자라고 규탄하고, 예의 ‘국가원수 자격 불가론’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또 ‘국가원수 모독죄’ 혐의로 3개월 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박정희에 의한 두 번째의 투옥이었다. 


박정희의 거듭되는 탄압에도 장준하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67년 악명 높은 6ㆍ8 부정선거에도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옥중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박정희에게 또 한 차례 타격을 가한다. 


장준하의 의정활동은 ‘국회의원 장준하’ 라기보다 ‘사상계 장준하’의 연장이었다. 다른 의원들이 기피하는 국방위원을 지원하여 군 내부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박정희와 간접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 무렵의 비화에 이런 것이 있다. 


당시 2군단장 김재규가 국방위에서 장준하의 의정활동과 생활의 청렴성을 지켜보고 크게 감동하여 의문사 이후까지 가족을 돌봐준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미담일 수도 있지만, 권력의 역학구조로 보아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박정희의 가장 충직한 부하로서 중정부장이 되고, 뒷날 그를 저격하여 유신통치를 종식시킨 김재규가 박정희가 가장 증오하는 정적 장준하를 도운 것은 흥미거리 이상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두 사람의 사활을 건 접전은 유신체제에서였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만든 헌법을 중단시키고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정희의 민주주의의 상도를 짓밟는 폭압조치에 장준하는 침묵하지 않았다. 


1973년 12월 24일 함석헌ㆍ김재준ㆍ이병린ㆍ지학순ㆍ김수환 등과 개헌청원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고, “헌행헌법을 개정하여 현행헌법 이전의 민주헌법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는 청원 내용을 박정희에게 공개발송한 것이다. 


장준하는 자신이 쓴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에서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라는, 백만인 개헌청원운동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박정희의 권력욕이 이런 정도의 청원으로 자제될 리는 없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하여 그 첫 대상자로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 정치보복에 나선 것이다. 장준하로서는 세 번째의 구속에 해당되는데, 비상군법회의는 1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출범에 앞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ㆍ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케 했다. 이 선언은 남북한이 분단 사반세기 만에 자주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것으로서 ① 외세에 의존 없이 평화통일 ② 상호 중상 않고 군사충돌 방지 ③ 제반교류 실시 ④ 남북적십자회담 적극 협조 ⑤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설치 ⑥ 남북조절위 구성 ⑦ 합의사항 이행을 민족 앞에 약속한다는 내용의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박정희의 행보에 끊임없이 비판을 가해온 장준하가 7ㆍ4 남북공동성명에는 지지를 보냈다. 그가 박정희의 정책을 지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박정희가 비록 정치목적으로 통일문제를 이용하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통일에 접근하게 되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남북공동성명을 지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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