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92회] 정부가 암살배후 밝혀야

2020.09.15

박정희는 장준하와 민주인사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거부’라는 표현보다 묵살했다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민주헌정’을 선포하면서 더욱 결집된 역량으로 유신체제 타도에 나섰다. 각계 재야지도자들의 힘을 묶는 데는 장준하의 인격과 헌신이 큰 몫을 했다. 대학가에서도 서울대 김상진 군의 양심선언 후 자결사건으로 학원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잇따라 선포하며서 물리적인 탄압으로 저항세력을 억누르고자 할 뿐 민주회복의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57세로 등산길에 의문사를 당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광복군정진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사망하기 전 어느 해 8월 15일, 기관원에 연행되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여 비통한 심경으로 후진들에게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광복군 장교였던 내가, 조국광복을 위해 중국땅 수천 리를 맨 발로 헤맨 내가, 오늘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는 조국에서, 그것도 광복절날 끌려다녀야 하는가?”


장준하의 이 말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대통령과 연결시켜보면 분노가 섞인 것일 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잘못 전개돼온 우리 현대사의 오류와 모순을 개탄하는 순열한 민족주의자의 독백이었음에 틀림없다.


잘못된 현대사의 오류는, 그러나 ‘끌려다니는’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더욱 참담한 운명으로 이어졌다. 많은 의혹을 남기면서 박정희의 정신적ㆍ이념적 그리고 ‘근원적’인 적수 장준하는 약사봉 계곡에서 사체로 변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함몰된 두개골 ⓒ장준하 선생 기념사업회


장준하 사인은 여러 가지 의혹이 풀리지 않고, 타살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근 이장과정에서 나타난 타살 흔적은 권력기관의 작용을 더욱 암시한다. 그리고 그 배후를 짐작케 한다. ‘역사정의’를 위해 새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사망하기 전 그의 행동거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신변정리를 한 것이다. 소중히 간직해온 임시정부 청사에 걸었던 태극기를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고, 32년 만에 부인과 갑자기 천주교 혼례의식을 치르고, 선친과 김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며 맨손으로 벌초하고, 김대중ㆍ홍남순 등 재야지도자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이같은 행동으로 보아 3ㆍ1구국선언과 같은 유신체제를 겨냥하는 모종의 범재야적인 ‘거사’를 준비했던 것 같다. 자신의 육체적 희생까지도 감수하는….


결국 그의 심상치 않은 거동이 정보기관의 촉수에 걸리게 되고, 약사봉의 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장준하의 의문사가 있은 지 4년 후 박정희도 심복 김재규의 저격으로 62세의 생애를 마감한다. 


두 사람은 식민지 시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 이래 30년 동안 분단 - 독재 - 민주항쟁으로 뒤범벅이 된 현대사의 정점에서 치열한 갈등과 대립을 벌였다. 


둘은 ‘현대사의 모순과 오류’가 빚은 산물일지도 모른다.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장남 장호권씨가 분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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