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회] 머리좋고 난폭했던 보통학교 시절

2018.12.07



어려운 시대 어려운 가정에서 어렵게 태어난 박정희는 9세가 되던 1926년 4월 1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다닌 것은 5형제 중에서 셋째인 상희와 막내인 정희 뿐이었다. 당시 상모리 마을 전체 90여호 가운데 상희가 첫 학생이었다. 박정희가 입학을 했을 때는 형은 이미 졸업을 한 후였다. 상모리에서 구미읍까지 8㎞, 왕복 40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셋째 박상희와 막내 박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진학시켰다. 양식을 꾸러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소작농 집안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는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당면 과제였고, 신교육을 받는 것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굳이 교육을 시키려면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서당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 비록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 자식을 둘이나 학교에 보냈고 특히 박정희의 월사금은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교육열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자식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굉장히 강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는 3학년 때 급장을 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 급장을 맡기로 한 규정 때문이었다. 1, 2학년과 5~6학년 때에는 우등상을 받았다. 두뇌는 우수했지만 신체 발육은 늦어서 6학년 때 키는 135,8㎝, 몸무게는 30㎏, 발육상태는 병(丙)의 평가를 받았다.

태아시절부터 급장이 되기 전까지, 박정희 역시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힘겹게 사는 식민지 어린이였다. 그러나 구미보통학교 3학년 때 급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박정희는 무차별 폭력을 일삼는 정복자로 변신했다. 1928년 급장 등극 이후 1979년 죽을 때까지 50여 년 동안 박정희의 인생은 급장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구미보통학교 시절 소년 박정희는 대단히 야무지고 지나치게 과묵하면서도 난폭했던 것 같다. 한 동기생의 증언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희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어요.(중략) 별명이 ‘악바리’, ‘대추방망이’ 였지만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도 못했지요. (중략) 일본인 교사들도 그를 귀여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급장을 지냈던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동급생보다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겁도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뺨을 후려갈겼어요.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권해도는 박정희보다 한 뼘 이상 키 차이가 났고 장가까지 들었는데 교실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1970년에 작성한 <나의 어린시절>에서 회고한다. 난폭하면서도 전략적 ‘관리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힘이 세고 말을 잘 들어먹지 않는 급우가 한 놈 있었음. 그러나 이 자가 수학은 전혀 못하고 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고 내 말을 듣게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휴식 시간에 산수문제를 가르쳐주고 숙제 못해온 것을 몇 번 가르쳐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굴복하던 생각이 난다.

구미보통학교 시절 박정희는 추수철이면 볏단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거나, 방학에 마을 아이들과 산골짜기에 소를 먹이러 다니는 등 가사를 도왔다. 그리고 자기보다 11세 위인 셋째형으로부터 역사와 위인전 얘기를 즐겨 들었다. 나폴레옹 전기와 이광수가 쓴 이순신전기를 읽고 특히 감명받았다고 한다. 박정희에게 이 두 사람은 일생을 두고 멘토가 되었다.
 
박정희는 어린시절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80연대가 구미에 와서 야외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서였다. 이후부터 병정놀이를 즐겨하고 뒷날 군인이 되었다.  

박정희는 <나의 소년시절>에서 이런 사실을 쓰고, 대통령이 되어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를 뭇자 “큰 칼 차고 싶어서 군인이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큰 칼을 차고 다녔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에는 빠지지 않고 마을에 있는 상모교회를 다녔다.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그가 어떤 경로로 교회를 다녔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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