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10회] 재학중 부친 강압으로 김호남과 결혼

2018.12.10

박정희의 대구사범 시절에 공적으로와 사적으로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이들 사건은 향후 박정희의 진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31년 교사 현준혁이 교내에서 사회과학연구회란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27명의 학생과 함께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관련 학생들은 모두 퇴학 조치되었다.
평남 개천 출신인 현준혁은 1929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교사로 발령받아 심리학ㆍ영어ㆍ한문ㆍ교육사를 담당하고, 1930년 가을부터 이 학교에서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조직, 지도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학교에서 쫓겨나고 구속되었다. 석방된 후 1934년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는 등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서 암살되었다.
 
비록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현준혁이 뿌리고 간 비밀결사 사건의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고 사회주의 서적을 읽혔으며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와 동기생 황용주(전 문화방송사장)는 현준혁 계열의 독서회에 들어가 읽은 사회주의 책이 발각돼 퇴학처분을 당했다. 박정희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이때의 영향이 어느 정도 미쳤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5학년이 시작되는 1936년 4월 1일 봄방학을 맞아 김호남(金浩南)과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19세, 신부는 16세였다. 신부는 선산군 도계면 김세호ㆍ이말렬 부부의 4남매 중의 큰딸이었다.
 
박정희의 아버지가 자기가 죽기 전에 막내아들을 결혼시켜야 한다면서 강행한 혼사였다. 김호남은 초등학교 과정인 2년제 간이학교를 졸업한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처녀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아버지가 혼사 얘기를 꺼냈을 때 한사코 반대하였다. 학교의 규정을 설명하고 졸업 후 교사로 발령된 다음 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였으나 아버지는 강압적으로 이 혼사를 밀어부쳤다. 당시 학교 교칙에는 재학 중 결혼이 금지돼 있었으나, 방학 중에 몰래 결혼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박정희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없는 결혼인데다 성격이나 수준에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고 신부는 이에 따르지 못한 형편이었다. 박정희는 방학 때 귀향해서도 한 방을 쓰지 않는 등 사실상 별거의 부부관계가 한참 동안 유지되었다. 김호남과는 딸 재옥을 출산한 후 이혼하였다. 그녀는 외롭게 살다가 1990년 71세로 박정희 사후에 세상을 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5년 동안 문과 쪽에는 크게 뒤졌으나 장차 군인이 될 소양을 단련하고, 시ㆍ서예ㆍ그림ㆍ작사ㆍ작곡 등 예능 분야에 능력을 보였다. 사범학교가 교사 양성기관이어서 이런 분야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그는 적성이 맞았던지 열심히 배웠다.

박정희는 1936년에 발간한 <대구사범 교우지> 제4호에 <대자연>이란 시를 썼다.

대자연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동기생들 중에는 나중에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입신한 인사가 더러 있었다. 황용주 전 문화방송사장, 서정귀 전 호남정유회장, 권상하 전 대통령정보비서관, 조증출 전 문화방송사장, 왕학수 전 부산일보사장, 이성조 전 경북교육감, 김병희 전인하대학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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