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유석종 목사의 나의 가족 이야기: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를 읽고

2025.04.24

                                                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April 24, 2025)


                                       유석종 목사의 나의 가족 이야기: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를 읽고


유석종 목사님은 1937년 일제강점기에 약방을 운영하시며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와 호수돈 여학교를 나와 유치원 교사를 하시던 신식 어머니 밑에서 태어 나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아들 다섯, 딸 다섯을 낳았는데, 세형제가 어렸을 때 죽고, 아들 둘 딸 다섯의 칠 남매가 남았고, 유목사님은 장남이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버님은 교인이 되신 후, 감리교 신학을 공부하시고, 전도사와 병원 원목일도 하셨는데, 일제시대에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된 것은 큰 위험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다. 해방후에 아버지는 대한국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셨고,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50세의 젊은 나이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된 후 희생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목사님이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와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B29 폭격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석종아, 너는 비행기에서 폭탄이 날아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어린 석종은, “폭탄이 오면, 빨리 강물에 뛰어 들어 몸을 숨기겠어요.” 했더니, 아버지는 “나 같으면, 폭탄이 내려오면 두 손으로 받아서 강물에 던져 넣겠다”고 하던 아버지의 유머와 낙천주의가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유목사님은 어렸을 때, 일제치하에서 못 부르게 했던 “울밑에선 봉선화” 노래를 어머니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불렀던 추억이 있다고 한다. 유목사님의 어머니는 우상숭배와 미신타파 운동에 열심이었고, 남편이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후에는 벽제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자녀들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어머니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처형장으로 끌려 가던 중, 인솔해 가던 청년이 어머니가 가르쳤던 제자였던 관계로 어머니는, “이번에 우리를 살려주면 세상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자네를 책임지고 살려 주겠다”는 말로 설득하여, 극적으로 살아 났고, 약속한 대로 그 청년이 국군에게 잡혀 재판을 받았을 때 미군정에 눈물로 호소하여 그 청년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유목사님이 유년시절에 학교에서 대머리 선생을 놀리려고 누가 “뻔대”라고 칠판에 써 놓았는데, 선생님이 그걸 보고 “뻔대”라고 쓴 사람이 나오라고 다그치는데도 아무도 자백하지 않자, 유목사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나, 유목사님이 자발적으로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거짓자백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모범생인 유목사님이 그랬을까 의아해 하면서 교육목적상 유목사님을 몽둥이로 여러차례 때렸는데, 그때 남우라는 학생이 울면서,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뒤늦게 자백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남우에게, “석종이가 대신 맞았으므로, 나는 너를 처벌하지 않겠다. 오늘 석종이가 학우들을 위해 희생한 아름다운 교훈을 배웠다. 학급 해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등록금이 없을 때는 어머니는 남감리교 선교사로 와 있던 Weems 여선교사에게서 돈을 빌려 아이들의 등록금을 내어 주는 등,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는데, 잔치집에 가서 먹은 음식의 식중독으로 어머니는 5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졸지에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칠 남매는 우왕좌왕 하지 않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명석한 머리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근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9살이던 막내 남동생 석영을 미국에 입양 보내자는 남감리교 여선교사이던 Weems 여사의 권유에 따라 미국 씨애틀에서 판사로 있던 감리교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결정했다 한다.


9살이던 막내동생이 인천에서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3주간의 항해여행을 할 때 혼자 였더라면 막막 했을텐데, Weems 여선교사가 3주간의 항해 여행동안 보호자로 동행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참 고마운 선교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판사 가정에 입양되어간 막내 동생 석영은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언어때문에 힘들어 했으나, 나중에 말하기를, “양부모님이 그분들의 친 아들 세명보다 나에게 더 사랑을 많이 쏟아 부었다”고 했다 한다.


막내 동생 석영이 미국인 판사집에 입양되어간 인연으로, 유목사님과 세 누이와 가족이 뒤따라 미국 씨애틀로 이민을 와서 세탁업, 용접업, 영양보조사 등의 일을 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었다. 그분들의 자녀세대에는 교수, 변호사, 전기 엔지니어등의 전문직으로 발전해 나간 유목사님의 일대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인도하심과 유목사님 가족들의 끈질긴 생활력,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심으로 일구어낸, 인생 승리의 드라마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방과 625전쟁통에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던 큰 누님과 매부는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올라 갔고, 매부가 전쟁 중 죽은 후에는 류희정 큰 누님은 북한에서 통일시인으로 불리는 김상훈과 재혼하여 다섯남매를 낳고 조선 문학편집자로 일하다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큰 누님의 남편이 된 김상훈은 원래 경상도 거창에서 지주였던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 문학청년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마친 지식인이었는데, 대지주의 후예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지주의 삶을 거부하고, 가난과 절망에서 허우적 거리는 불우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것이 공산주의자가 된 계기였고, 전쟁 중 북한국에 가담하여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전쟁후에는 북한의 조쏘출판사의 편집과장으로 일을 했다 한다.


김상훈이 북행길에 오른 여성기자 류희정을 만났을 때, 서로 결혼하여 가족이 남쪽에 있는 처지라, “통일이 될 때 까지만 결혼생활을 하자”고 다짐한 후 다섯 자녀를 낳고 김상훈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의 결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둘째 누님 희성은 경성여자 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어 625전쟁이 터져 인민군대가 서울을 점령했을 때 희성 누이는 19살의 젊은 나이로 경기도 파주군의 공산당 당선전 지도원으로 임명을 받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유목사님은, “아버지는 공산당에 납치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딸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있었으니, 어이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희성 누님은 북한에서 여성기자로 활동하다가 정의감이고 강하고 인정이 많은데다 얼굴이 잘 생긴 북한의 노력영웅 김욱찬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고 한다.


셋째 누님 희정도 625전쟁중 고향 문산이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자 북한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노래를 부르던 “가창대”에 끌려 갔다가 가까스레 탈출하여 국군에 의해 구출된 후 이화여대 사범대학 아동교육과를 마치고, 미국에 이민을 가서, 병원의 보조영양사로 일하고, 남편은 용접사로 일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자녀교육에도 성공했으며,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동생들도 씨애틀의 한인 교회에 나가며, 성공적이고 행복한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유석종 목사님은 명문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동기로는 부하들을 구하고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배우 오현경씨도 있었다고 한다. 유석종 목사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하여 훌륭한 장군이 될 마음이 있었으나, 육사시험을 앞두고 스케이트를 타다가 발에 다쳐 좌절해 있을 때, “석종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려면, 군사력 못지 않게 영적 재건이 필요하다”는 영감을 받았고, 어머니로 부터, “아버지가 못 다 이룬 목사의 꿈을 네가 이뤘으면 한다”는 권면의 말을 듣고 서울감리교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목사님은 서울감신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동기생 위연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고, 졸업후 기독교 서회 편집직원으로 취업을 해서 일을 하다가, 국제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미 연합감리교회에서 주는 십자군 장학금을 받고 Syracuse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를 한 후, 귀국하여 기독교 서회에서 “기독교 사상” 주간으로 일했으며, 손수 번역하여 엮은, “현대신학자 20인” “대중운동론”과 같은 책을 출판하시던 중,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교수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을 탄압하는 당시 박정희 정권 밑에서 정의와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신문방송학 교수의 입지가 좁아 지는 것을 느끼고, 미국이민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석영을 입양해 준 미국인 양아버지가 판사직을 은퇴한 후 은행장이 되었을 때, 갓 이민 온 유목사님을 은행에 취업을 시켜 주었고, 곧 은행지점장이 될 길이 열렸으나, 유목사님은 목회자로 살고 싶어서, 미국인 교회 Vashon UMC에 파송 되어 보람차고 성공적인 미국인 교회 목회를 하였고, Tacoma 미국인 교회를 섬길 때에는 한인이민자들의 요청으로 Tacoma한인연합감리교회를 창립하여 부흥성장시키셨다.


미주본토 최초의 한인교회인 상항제일 한인연합 감리교회에서 11년간 목회하시는 동안, 숙원사업이던 교회 건물을 이전확장 시키셨고,  한흑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흑 연합예배를 주도하여 인종을 초월한 기독교인의 화합을 도모하셨다. 


그 후, 미 감리교 본부 출판국 편집직원으로 발탁되어, “제자화를 위한 성경공부” 교재를 번역, 출판하여, 한국과 미국의 교회에 그룹 성경공부 교재를 배포하는 일을 도우셨으며,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감리사로 임명 받아, 연회와 지역교회를 오가며 화해와 중재의 사역을 감당하시느라, 공식업무차 운전한 거리가 한 해에 6만 마일 넘은 해도 있었다고 하며, 그 여파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도 하셨다 한다.


아버님을 공산당의 손에 잃고, 어머니도 식중독 사고로 잃고 고아가 된 칠 남매중 장남으로 유석종 목사님은 어딜가나 희생과 사랑의 모범을 보이며,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인화를 이루는, 겸손하며 사랑이 많으신 존경받는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게 되어 감사하고 있다.


625전쟁 후 남과 북, 독일과 미국으로 흩어졌던 형제 누이들은 54년이 지난 후 미국에 사는 동생들이 북한에 사는 두 누이와 그들의 자손들을 세번 방문함으로 이념과 갈등을 초월한 혈연간의 사랑과 연민을 회복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유목사님의 책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 나의 가족이야기”는 최근 “Rebuilding the Fallen Fence: A Korean American Family”라는 영문판으로 출판되어 Amazon을 통해 구입해 볼 수 있다 한다.


가시는 곳 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지만, 아내가 치매증으로 기억을 잃어 가는 아픔을 옆에서 지켜 봐야 했으며, 은퇴 후 13년을 병든 아내를 보살펴 주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 유 목사님은 이제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며 관조하는 여유를 갖고, “하나님의 온기가 흐르는, 손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하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계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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