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7회] 6ㆍ25전쟁으로 군정보기관에 복직

2019.01.18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정희는 군복 대신 까만 양복을 입고 비공식 문관으로 1년 3개월 동안 군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 아무리 정보국장 백선엽의 배려라고는 하지만 남로당 프락치로 무기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군정보기관의 문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은 여전히 미스테리에 속한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기록이다.


1948년 말까지 무직자 노릇을 하던 박정희는 1950년에 들어서서 6ㆍ25발발 직전에 다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무보수 문관으로 고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공보국장이었던 이용문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대령 장도영이 들어서자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접근하여 통사정, 장도영은 정일권과 소령 이기진의 지원을 받아 박정희를 구명하였다. 


박정희는 곧 육군정보국 정보과에 배치되어 정보과장이던 소령 유양수(전 국가재건최고위원)의 지시를 받으며 무보수로 일하는 일방, 과원들의 모금과 정보비 일부를 떼어 받아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남침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박정희에게 또 한 번 재생의 기회였다. 


해방 후 혼란기가 일본군 전력을 탈색시키는 기회였다면 한국 전쟁은 무기수 좌익사범의 족쇄를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는 전쟁 직후인 6월 27일 용산 육군본부 지하벙커에 있는 작전상황실로 복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대전을 거쳐 대구로 떠난 뒤이고, 다음날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하게 된 시점이다. 박정희는 30일 정보국 요원들의 집결지였던 수원에서 장도영 정보국장에게 복귀 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다시 현역 장교로 복귀하게 되었다. 


새벽에 책상 위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살펴보니 상황실 저쪽 편에 몇몇 당직하는 장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박정희 문관도 끼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낡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근무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문득 “계속 문관으로 둘 것인가. 장교가 부족한데 그를 현역으로 복귀시켜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6월 30일 오전 중 수원초등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에 나갔더니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적군이 서울에 진입한 상황으로 보아서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지 않겠는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저렇게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버렸다. 오히려 과거 그를 조금이나마 달리 생각해왔다는 것이 미안하다는 마음이었다.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