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8회]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

2019.01.19

군대에 복직한 박정희가 소령 계급장을 달고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와 부산을 옮겨다니던 1950년 8월 하순 어느날, 대구사범 1년 후배인 송재천이 찾아왔다. 그를 만난 것은 천생의 배필 육영수(陸英修)를 소개받은 운명의 순간이었다. 


송재천은 충북 옥천농고 교사 출신으로 전쟁이 터지자 소집 영장을 받았는데 박정희가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도록 해 주었다. 송재천은 외가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를 박정희에게 소개하였다. 


1925년 11월 29일 충북옥천에서 육종관과 이경령의 딸로 태어난 육영수는 13세 때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7세에 졸업하고 옥천공업여자전수학교에서 가사담당 교사로 1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남자교사의 농담에 마음이 상해 그만두었다 한다.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옥천 집에 살 때 육영수는 ‘작은아씨’로 불리면서 귀공녀의 대접을 받고 지냈다. 


육종관은 미곡상ㆍ금광 등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옥천군에서 큰 부자였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개화사상에 심취했으나 사업에 소양이 있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부인 외에 다섯 명의 소실과 여기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육영수는 육종관 - 이경령 사이에서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육종관은 전란기에 군인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한사코 반대했으나 어머니가 우겨서 박정희와 육영수는 부산에서 맞선을 보았다. 


시인 박목월은 육영수 사망 후 그의 전기를 펴냈다. 


육영수는 전통적 기준에서 볼 때, 기품 있는 소녀였으며 부유한 가정 출신 답게 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과목 중에서는 수예ㆍ재봉ㆍ가사 등에 탁월한 성적을 보였다. 배화고보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옥천으로 내려가 다시 ‘작은아씨’로 돌아갔다. 그녀는 세 딸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재산 관리 등에서 아버지의 중요한 비서였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집안에서 일을 하다 나이가 들고 병이 나서 오갈 데 없게 된 늙은 하녀나 소박을 맞고 이제 막 자신의 집의 하인으로 들어온 젊은 여인에게 깊은 동정심을 보였으며 그들을 정성껏 돌보곤 했다. 


육영수는 청와대 영부인 시절 박목월과 가진 대담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써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 모습이 정직하거든요.”  라고 말할 정도로 선을 볼 때부터 박정희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육영수의 어머니는 남편의 끝없이 이어지는 축첩에 크게 마음을 상해하면서 군인은 그런 면에서 깨끗하리라 기대하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선을 보게하고 함께 사위감을 직접 만나 보았다. 이경령이 박정희의 기혼사실을 사전에 알았는지의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식 장면. 박정희는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인 1950년 8월 육영수와 맞선을 봤고 11월에 협의이혼을 하자마자 12월에 결혼을 했다. ⓒ정운현


두 사람은 6ㆍ25 전란기에 대구와 부산을 오가면서 교제를 하다가 1950년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해프닝이 벌어졌다. 주례를 맡은 허억 대구시장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이라고 말해 장내에 한바탕 웃음을 일으켰다. 박정희를 여자 이름으로 착각하여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박정희에게 육영수는 과분한 처자였다. 우선 가문에서부터 달랐다. 육영수는 부유한 집의 ‘작은아씨’로 이목 수려한 신여성이고, 박정희는 흠결이 많은 상처투성이의 군인장교였다. 


“육영수는 박정희를 전통적 방식으로 사랑했으며,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지는 박정희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리고 겉으로는 육영수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영수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박정희와 육영수, 두 사람은 육종관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합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누구의 눈에도 잘 어울리는 쌍이 아니다. 아버지의 반대와 박정희의 열악한 조건에도 개의치 않고 육영수가 결혼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신경증적인 욕구나 갈등이 강했다는 점, 둘째는 박정희가 그녀 자신의 갈등을 충분히 해소시켜 줄 거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둘 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다. 또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는 어머니를 두었던 것도 비슷했다. 감정의 억압으로 나타났던 두 사람의 강박적인 성격 특성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아마 그들 사이에는 상당한 수준의 감정적 동질감이 존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박정희가 육영수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1958년 소장으로 진급할 때까지 전셋집으로 전전했을 때도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내조했으며, 결혼 후에도 남편이 소속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술집 여자들과 자주 바람을 피워도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박정희 집권 후 헌정유린과 혹독한 인권탄압에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을 때에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따뜻했다. 육영수는 1969년 박정희가 3선개헌을 강행할 때 이를 반대하여 ‘청와대의 야당’이란 호평을 받았다. 


83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 화보집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에 실린 육영수 여사의 모습. 왼쪽은 김성은 장관의 부인이고 육여사 앞의 어린이는 소년 박지만군이다. 


박정희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를 지었다.


밤은 깊어만 갈수록 고요해지는군 

대리석과도 같이 하이얀 피부 

복욱(馥郁)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香薰)을 뿜는 듯한 그 얼굴 


(중략)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굴 더욱 어여쁘고. 

평화의 상징!

사랑의 권화!


아! 그대의 그 눈, 그 귀, 그 코, 그 입. 

그대는 인(仁)과 자(慈)와 선(善)의 세 가닥 실로써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진저 


(중략)


나의 모든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착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써 인생 코오스가 되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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