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6회] 무기형, 백선엽 등 만군인맥이 구명

2019.01.17

1949년 2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과 파면ㆍ급료 몰수형을 선고받은 박정희는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동시에 형의 집행을 면제받았다. 


아무리 건군 초기의 미숙기라 해도 여순사건을 겪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직후에 남로당 군사책으로 지목되어 무기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곧 풀려날 수 있었던 데는 여전히 의문이 따른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 자료사진)


박정희는 비교적 수사 초기에 구제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김정렬의 구명 운동에 의해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이 움직였고, 수사팀장인 김창룡이 여기에 동조하여 구명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숙군 수사를 총괄했던 육본 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이 박정희를 심문해본 후 안심해도 좋다고 판단하고, 의사 결정의 키를 쥐고 있던 정보국장 백선엽이 결심함으로써 그의 구제는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김창룡의 구명 사유서를 겸한 신원보증서를 적고, 여기에 김안일과 백선엽이 도장을 찍어 신원보증을 함으로써 그는 12월 10일 불과 한 달 만에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구제될 수 있었던 것은 만주군맥과 하우스만의 지원에 있었다. 하우스만의 지원 부분은 앞에서 쓴 바 있거니와, 만군출신인 백선엽의 경우는 유별났다. 끈끈한 박정희 구명의 핵심인물은 정보국장 백선엽이었다. 


평안남도 강서출신인 백선엽은 만주국이 세운 봉천중앙육군훈련소(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어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창설된 조선인 특수부대로 편성되어 일제 패망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랑(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ㆍ고문을 당했다. 


(이승만 시절 승승장구한 백선엽 대장이 경무대 행사에 참석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 자료사진)


백선엽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내다가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ㆍ최남근 등과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월 제1기로 졸업한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활동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정보실장(문관)이었던 김종필의 증언이다.


위기에 처한 박정희 소령을 구해준 건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그는 군대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백 대령이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침 김창룡은 사생활이 깨끗한 백선엽을 가장 존경하는 상사로 여기고 있었다. 김창룡도 백 대령 뜻을 따라 박 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박 소령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그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한 것도 백선엽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위해 원래 직제에 없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위인설관이었다. 


박정희를 살려준 백선엽 대령은 박정희를 철저하게 배려했다. 감옥에서 출감한 그를 일주일 동안 쉬게 한 후,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을 내 자기 밑에 둔 것이다. 이처럼 피의자를 정식 보직에 임명했다는 것은 박정희에 대한 백선엽의 구제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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