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5회] 하우스만의 지원과 만군 인맥으로 석방

2019.01.15

박정희는 남로당 세포로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이재복(李在福)에게 포섭되었다고 한다. 


이재복은 누구인가.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이재복(1948년 당시 46세)은 원래 목사였다. 평양 신학전문대학 졸업 후 일본 동지사대 신학부를 나와 경북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주의자가 된 그는 해방 뒤 경북 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는 박정희 형 박상희, 5ㆍ16 후 박정희를 포섭하려 남파됐다가 체포돼 사형된 황태성 등과 동년배로 친구사이였다. 그는 이른바 대구 10ㆍ1사건으로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남로당에서 군(軍) 총책을 맡고 있었는데, 군부의 세포들은 대개 그가 포섭했거나 아니면 그가 포섭한 중간책에게 다시 포섭당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와 처형된 최남근 등은 그가 직접 포섭한 인물이다. 


박정희는 1949년 2월 8일 군사법정에 섰다. 재판장 김완룡 중령, 심판관 김대현 중령 등 3인, 검찰관 신모 중위, 관선 변호인 최영희 중위, 피의자들의 조서 작성을 맡았던 방첩대 소속 이한진 대위가 배석했다. 이날 박정희는 사형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소령 계급에서 파면되었으며 급료도 몰수당했다. 


그와 같이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모 대위 등은 사형 구형에, 사형 언도를 받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박정희와 만주 군관학교 또는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이며, 오일균은 일본육사 61기 출신이었다. 


또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3공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이주일은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나 무죄 판결로 풀려났다. 이주일은 박정희의 권유로 군 입대 전에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또 박정희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한 것으로 ‘문건’에 나와 있다. 


박정희는 남로당 비밀요원이었으나 실제로 활동은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나 구체적인 좌익활동을 한 흔적은 없다. 그가 숙군의 태풍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은 미국 뉴저지주 출신으로 정부수립 초기부터 한국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1946년 8월 미 육군 대위 신분으로 미 군정 요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국방경비대 제8연대(춘천) 창설 연대장을 지내고, 같은 해 10월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 창설작업을 지휘하고, 1948년에는 여순사건 진압을 진두지휘했다. 


하우스만이 박정희의 구명에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가 군사법정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도 쉽게 풀려난 데는 만주인맥과 함께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그를 어려울 때 구해 준 동료ㆍ선배ㆍ후배들의 발뒤꿈치를 사정없이 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끔 미군들 사이에는 ‘스네이크 朴’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그에게는 돕는 사람이 많았다. 


이 죽음의 사슬에서 그를 풀어낸 사람 중에는 정일권ㆍ백선엽ㆍ장도영ㆍ김점곤ㆍ김안일 등 상당수를 헤아린다. 



1952년 10월 육군정보국 시절의 백선엽 대령(오른쪽 두 번째)과 박정희를 수사했던 김창룡 특무대장(오른쪽 첫 번째),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왼쪽 두 번째)도 있다. 사진=백선엽 장군 제공


육본 정보국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점곤은 숙군 작업의 실무를 맡고 있던 김창룡(후일 방첩대장을 지내다가 허태영 대령 등에 의해 피살)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체포 소식을 김창룡으로부터 일찍 보고받을 수 있었다. 김점곤은 김창룡에게 ‘때리지 말 것’과 ‘먹을 것을 넣어 줄 것’을 우선 부탁해 박정희를 고문에서 살아남게 했다. 


김창룡의 직속상관이나 수사실무 책임자였던 김안일은 숙군 책임자인 백선엽을 만나게 해달라는 박정희의 소청을 받아들여 그를 데리고 백선엽의 방을 방문했었다.


김안일은 준장 퇴역 후 목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 목사로 있다. 그가 박정희에게 유달리 호의를 베푼 것은 김창룡의 건의도 있었지만 朴이 신문 과정에서 軍의 공산당 비밀 조직을 소상히 불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했던 점과, 사형수로 있으면서도 의젓함을 잃지 않은 인품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 숙군 작업이 얼마나 잘 엄중하게 처리되고 있는가에 대해 1일 보고를 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신성모 국방장관, 윌리엄 로버트 고문단장 등과 함께 수시로 이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피고의 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이유로 나는 그가 일본육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는 아니며, 군의 숙군 작업을 위한 군내부의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한 공로를 들었다.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