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48회] “군주 앞에 불려나온 신하처럼”

2019.03.29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첫 번째 만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좌를 보장받기 위해 자진해서 베트남(월남)에 한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서 케네디의 환심을 샀다. 박정희의 방미길에 동행 취재한 <합동통신>의 리영희 기자는 케네디 앞에 비굴한 박정희의 모습을 회고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회담할 때 보인 비굴한 태도에서 실망감을 더하게 되었다. 케네디의 오만방자한 태도도 꼴보기 싫었지만, 박정희의 비굴한 태도는 목불인견이었다. 박정희는 금색 도금 테두리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다리를 반듯이 모으기도 하고 꼬기도 하고 그랬다. 마치 군주 앞에 홀로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박ㆍ케네디 회담은 ‘성공적’인 것처럼 발표되고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리영희는 ‘공식발표’ 뒤에 깔린 미국 정부의 속셈을 알고 싶었다. 4ㆍ19혁명 당시부터 기고를 통해 사귀게 된 <워싱턴포스트> 주필과 편집국장의 도움으로 미 국무부의 정상회담 실무 담당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서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한 발언을 소상하게 들을 수 있다.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공정한 선거를 통한 민정으로 이양할 것, 민정이양에 앞서는 군의 정치 관여 금지와 원대복귀, 그때까지 모든 경제원조의 집행 연기, 군사원조의 잠정적 동결, 박정희가 제1차 경제계획으로 요구한 공업화 계획 자원 23억 달러 요구의 백지화, 조속한 한ㆍ일회담 재개를 통하여 단시일 내의 한일 국교정상화 실현, 베트남사태에 대한 남한의 협력 등을 요구한 거에요. 


그 중에서도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한일회담 재개를 통한 조속한 한ㆍ일 국교정상화 실현이었어요. 


리영희 기자의 이 특종은 국내 언론에 소상하게 보도되고, 박정희의 미국행이 여지없이 추락되었다. 케네디는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를 요구한 것이다. 우리 속담대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케네디의 압력에 박정희는 ‘월남파병’의 미끼를 제시한 것이다.


이 기사의 ‘후폭풍’은 거셌다. ‘왕위계승’의 조공 행차가 ‘지명’된 기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셈이다. 서울의 관가,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동아ㆍ조선의 ‘성공적 정상회담’ 기사는 묻히고, 케네디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과 주문, 평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기사 이후 리영희는 긴 세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감내하기 어려운 탄압을 받아야 했다. 언론사에서 쫓겨나고 간신히 얻은 대학 강의도 박탈되었다. 


1980년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반공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살고 만기 출옥하는 리영희 선생의 모습. 


<르몽드>는 당시 이 일을 전하면서 리영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 일컬음.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월남파병’의 미끼를 주고, 케네디는 조속한 한일국교정상화의 ‘주문’을 던지면서 박정희의 미국행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리영희 기자의 폭로성 기사로 박정희는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미국은 전통적으로 자국에 충성하려는 동맹국의 ‘푸들’을 챙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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