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1회] 유신, 히틀러 수법의 헌정유린

2019.05.19

유신 개헌 후 계엄 발표 현장


“힘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권력은 때로 공포에 떨 것이다.”(쿄슈트) “무제한의 권력은 지배자를 타락시킨다.”(Wㆍ피트).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권력감정’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식,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식,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신경의 줄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는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는 10여 년 동안 집권하면서 이미 ‘권력감정’에 도취되었다. 그가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죽음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느닷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반대파의 정치활동을 전면봉쇄하는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3선연임 금지의 헌법을 고친 지 3년, 4ㆍ27대통령선거로 8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또 다시 쿠데타로 헌정을 짓밟고, 1인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이로부터 1979년 10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7년 동안을 마치 봉건 군주처럼 군림하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그 중에는 “다양한 직업여성 100여 명을 보유”한 중앙정보부가 주선한 엽색행각의 품목도 들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수법은 아돌프 히틀러의 정권탈취 수법과 비슷하다. 


나치당으로 독일의 제1당이 된 그는 사회당ㆍ노동조합 등을 해산시킨 데 이어 이른바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국회방화사건을 조작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대통령과 수상을 겸하는 총통(Fuihrer)이 되었다. 비밀경찰이 이같은 반역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박정희는 이날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5ㆍ16쿠데타에 이어 두 번째 반역행위다. 박정희가 발표한 4개항의 비상조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72년 10월 17일 하오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②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 하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 비상국무회의는 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한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


박정희는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 비상조치의 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열강의 세력균형의 변화와 남북한 간의 사태진전에 따른 평화통일과 남북대화를 추진할 주체가 필요한데, 현행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으며,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냉전시대’의 주체이기도 했던 자신의 행적과 민주공화제의 국체를 송두리 째 부정하는 반역을 자행한 것이다.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제 반대, 유태인 반대, 생존권의 건설 등을 내세웠듯이, 박정희는 대의제를 파쟁과 정략으로 몰면서, 직전 대선에서 야당후보 김대중이 평화통일론과 남북대화를 주창할 때는 용공좌경으로 비난하였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이를 체제변혁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는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포고령 제1호로서 ① 각 대학의 휴교조치 ② 정치집회 금지 ③ 언론ㆍ출판ㆍ보도ㆍ방송의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계엄당국은 신민당 강경ㆍ소신파 의원 김상현ㆍ이세규ㆍ최형우ㆍ강근호ㆍ이종남ㆍ조윤형ㆍ김한수ㆍ조연하 등을 구속하고,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서 체제정비에 나섰다. 재야 민주인사들도 다수 불법체포ㆍ감금하였다. 


1972년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 공고되고 한 달간의 공고기간 동안 정부는 계몽활동을 벌였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회부했다. 일체의 반대운동이 금지된 찬성홍보 일방적인 개헌안의 국민투표는 1,441만 714명이 투표하여 91.5%에 이르는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고 발표했다.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확정된 ‘유신헌법’은 임기 6년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토록 하고, 국회의원 3분의 1도 여기서 뽑기로 하는 등 사실상 ‘국체의 변혁’에 이르는 비민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희는 헌법을 개정할 때 아예 헌법 제2조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변개시켰다. 임시정부 이래의 ‘국민주권주의’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고 변개한 것이다.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는 말은 얼핏 지당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어마어마한 꼼수가 있다. 


첫 번째는 ‘국민=주권자’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주권자’라는 헌법상의 정당성을 확보해두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국회나 정당을 제쳐두고 국민과 직접 거래(국민투표) 하는 것을 독재자가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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