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2회] 1인독재 영구집권 야욕의 유신체제

2019.05.27

박정희는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통치체제의 구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제적 1인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유신헌법’을 만든 것이다.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 대통령선거제도를 국민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로 바꾸고 △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ㆍ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며 △ 대통령이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면권을 갖고 △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소선구제에서 2인선출구제로 바꿔 여야의원이 동반 당선되도록 만들었다. 


야당의 의석수에 제한을 가하고, 국회의 비판기능을 전면 마비시키는 등,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입법부와 사법부를 정권의 시녀로 전락시킨 반민주적인 악법이었다. 


‘10월 유신’은 한마디로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로서, 박정희는 이미 10ㆍ27 보위법 파동과 7ㆍ4남북공동성명 등 내외적인 여건을 조성한 다음 야당 분열의 틈새를 노려 또 다시 헌정을 유린한 것이다. 


당시 신민당은 양분상태에서 치열한 당권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71년 진산파동으로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김홍일은 1972년의 전당대회를 맞아 유진산의 롤백작전에 직면하자 김대중계의 지원을 받아 유진산사단과 대결을 시도하다가 정면충돌을 빚어 신민당은 마침내 분당사태를 맞게 되었다. 


유진산사단과 김홍일사단으로 갈라진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1972년 9월 26일과 27일 각각 시민회관과 효창동 김홍일 자택에서 별도의 대회를 열어 분당사태를 빚고 만 것이다. 시민회관대회에는 유진산ㆍ고홍문, 김영삼, 이철승, 정해영, 신도환 등 이른바 진산사단의 범주류가 참석하여 합법성을 주장하고, 효창동대회에서는 김홍일ㆍ김대중ㆍ양일동계가 참석하여 시민회관대회의 무효를 선언했다. 


두 대회가 개최된 후 김홍일 측이 유진산을 상대로 당대표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여 

법통시비가 일어난 가운데, 국회는 8ㆍ3재정조치 이후 문제가 된 ‘동결사채’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국정감사의 활동을 벌이다가 10월 유신으로 국회해산과 정치활동의 중지라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이같은 야당의 분열상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선거에 단독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정희가 무력을 동원한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감행하게 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다시 개헌을 단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 밖으로 고전한 데다 야당에 의한 국회 비판기능의 활성화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싸우면서 따라 배운다는 속언이 있다. 


박정희는 북한식 흑백 투표와 다르지 않는 유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4선되었다. 그날 저녁의 일.


72년 12월 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필운동 174번지 육인수 의원 집에서는 가족끼리의 조촐한 축하 모임이 벌어졌다. 참석자는 박정희대통령 부부와 대통령의 장모 이경령여사, 손위처남 육 의원, 처조카사위 장덕진 의원(공화ㆍ영등포 갑), 근혜ㆍ근영양ㆍ지만군 등 세 자녀, 대통령의 군 동료인 민기식 의원(공화ㆍ청원)ㆍ육 의원의 딸 부부 등이었다. 


이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후보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재적 대의원 2천3백59명 중 2천3백5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혼자 나오니까 심심해.”


식사 후 남자들끼리 따로 가진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육군 참모총장출신의 민 의원에게 느닷없이 한마디 툭 던졌다. 이날 식사 중에도 대통령은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고 민씨(71)는 기억했다. 


“혼자 씨름한 것 같애”라고도 말한 대통령의 안색은 왠지 고적해 보였고, 따라서 주흥이 고조될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날 우리들이 술을 잘 안 마신다고 대통령께서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돌렸던 기억이 납니다”고 동석했던 장덕진씨(59ㆍ대륙연구소회장)는 회고했다.


이날 선거가 겉치레에 불과한 ‘가짜 대통령(민씨의 표현)’을 뽑는 선거였다는 것을 박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었다. 명분이야 어떻든 민주주의의 기본에서 한참 벗어난 선거였고, 우리 헌정사에 두고두고 타산지석으로 남을 한 시대의 궤적이 이미 찍혀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쿠데타를 감행하기 전에 두 차례나 북한 측에 ‘사전통보’한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주한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1972년 10월 31일자 비밀문건(2급-Secret)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은 10월 12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서 “남북 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이 비밀문건은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실무대표인 정홍진이 계엄선포 하루 전인 10월 16일 북쪽 실무대표인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보했다”고 적었다. 


지난 2009년에 공개된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에는 이후락이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표인 김영주에게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10월 16일) 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우연인지 ‘짜고 친 고스톱’ 인지,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을 유일체제로 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은 1972년 12월 27일 같은 날 제정되었다. 


박정희는 1961년 5ㆍ16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국가안보와 반공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11년 후 유신쿠데타는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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