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81회] 마녀사냥, 민청학련사건 조작

2019.06.21

정체성이 없는 인물이나 정통성이 취약한 권력자가 가장 손쉽게 휘두르는 무기가 매카시즘이다. 반대자를 공산주의자로 낙인하는 매카시즘은 미국에서 1950년부터 5년간 상원의원 매카시가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멀쩡한 군인ㆍ공무원들까지 소련 공산당 첩자들이라고 몰아부쳐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면서 정치사회학의 용어로 자리잡았다. 


미국에서는 일회성 소동으로 끝나고만 매카시즘이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극성을 부린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와 그 아류 정권에서 특히 심했다. 매카시즘의 뿌리는 깊다. 기독교 사회였던 15세기 유럽에서 시작하여 18세기 초까지 300년 동안 계속해서 진행된 이단자에 대한 박해 ‘마녀사냥(witch hunting)’은 마녀가 사탄과 계약을 맺었다고 여겨 학살하거나 재판에 회부했다. 1692년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은 아직도 기록이 남아 있다. 


박정희는 권력유지의 방편으로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풀어 말하면 정치적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었다. 집권 13년 차에 이른 박정희에게 1974년은 정치적 위기의 해였다. 계엄령, 위수령에 이어 긴급조치까지 발동하여 무시무시한 형벌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으나 날이 갈수록 약효는 별로였다. 


해서 다시 꺼낸 것이 ‘용공카드’로 국민을 겁박하는 길이었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국민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날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지 3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직수 부장의 발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형성 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ㆍ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


이들이 획책한 이른바 4단계 혁명은, ① 유신체제를 비민주 독재로 단정, 반부정세력을 규합하며 ② 4월 3일을 기해 전국 주요 대학이 일제히 봉기하여 중앙청ㆍ청와대 등을 점거 파괴하고 ③ 민주연합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인물로는, ① 전 인혁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의 불순세력 ② 재일조총련 비밀조직의 곽동의와 곽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다차카와 하야카와 등 일본인 2명 ③ 기독교학생총연맹 간부진 ④ 이철ㆍ유인태 등 주모급 학생운동자와 유근일 등이다.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 연합뉴스


1973년 말 절정에 달했던 학원가의 반독재 시위가 긴급조치 제1호의 선포로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이듬해 신학기 시작과 더불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초부터 떠돌기 시작한 ‘3, 4월 위기설’이 나도는 가운데 4월 3일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에서 일제히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 의대생 500여 명은 흰 가운을 입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데모의 특징은 거의 같은 시간에 각 대학이 동시에 시위를 벌였다는 것과 선언문의 주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배포한 <민중ㆍ민족ㆍ민주선언>의 유인물이 민청학련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① 부패ㆍ특권ㆍ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을 시정하고 ② 서민들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근로대중의 최저생활을 보장할 것. ③ 노동악법을 철폐하고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

④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구속된 애국인사를 석방할 것. ⑤ 모든 정보, 폭압정치의 원천인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 사건을 기화로 4월 3일 저녁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정부는 민청학련사건을 빌미삼아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에 족쇄를 채우고자,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했다. 군법회의에 송치된 사람은 배후조종 혐의로 전 대통령 윤보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ㆍ김찬국 교수를 비롯, 인혁당 재건관련자라는 21명, 일본인 2명을 포함한 무려 253명에 이르렀다. 


7월 21일 열린 비상군법회의 첫 공판에서 이철ㆍ유인태ㆍ여정남ㆍ김병곤ㆍ나병식ㆍ이현배 등 9명에게 사형, 유근일 등 7명에게 무기징역 등 가혹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은 1974년 6월 15일부터 10월 11일까지 119일 동안 계속되었다. 1974년 한여름 내내 긴급조치 피의자들을 다루는 군법회의 공판정은 연일 사형, 무기징역, 20년, 15년 등 유례 없는 중형을 선고하여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가 학계 및 종교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번져가고 각계각층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격화되는 한편, 외교문제로까지 번져 미국의회에서 대한군사경제원조의 대폭삭감이 논의되는 등 국제여론도 악화되었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는 인혁당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 일부를 제외한 사건관련자 전원을 석방함으로써 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종교계, 학계 등 광범위한 세력이 연대의 틀을 마련했으며, 지식인들이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박정희는 스스로 몰락의 함정을 판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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