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9회] 들불처럼 번진 반유신투쟁

2019.06.11

1973년 12월 24일 극비리에 서명을 완료한 뒤, 계훈제와 장준하는 각계 민주인사들과 함께 개헌청원 운동본부를 발족, 본격적인 유신 철폐 운동에 나선다.


1973년 12월 24일 함석헌ㆍ장준하ㆍ천관우ㆍ계훈제ㆍ백기완 등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서울 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개헌청원운동은 불과 10일 만에 30여만 명의 서명을 받는 등 놀라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는 12월 29일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최근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 중에 유신체제를 뒤엎고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면서 개헌서명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의 반협박적인 담화에도 불구하고 개헌서명 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갔다. 개헌청원운동본부의 장준하 대변인은 박정희 담화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청원운동은 정부 당국자가 주장하는 바 우리 백성들이 정부당국과 대화를 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라 전제하면서 “당국은 이 합리적이며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을 막는 우를 범하지 말라.”면서 청원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맞섰다. 


전국 주요 대학이 반유신 시위에 나선 가운데, 11월 15일 단식농성을 하던 한국 신학대학생 90여 명은 삭발농성에 들어갔으며, 한국기자협회는 11월 29일 언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을 충실히 보도하기로 결의했다. 기협회장단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도 각각 결의문을 채택하고 “민주언론의 창달을 위해 71년 5월에 채택한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준수할 것과, 최근 일선기자들이 각 사 단위로 혹은 기자협회를 통해 밝힌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는 당연하고 순수한 것이므로 이를 뒷받침” 할 것을 다짐했다. 


12월 13, 14 양일 간에는 전국대학 총학장회의도 결의문을 통해 “우리 총학장 일동은 교수 전원의 협조를 얻어 자율을 바탕으로 학원의 정상화, 면학분위기의 조성이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룩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고 밝혔다. 


특히 함석헌ㆍ김재준ㆍ천관우ㆍ이병린 등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와 윤보선ㆍ김수환ㆍ유진오ㆍ백낙준ㆍ이희승ㆍ이인ㆍ한경직ㆍ김관석ㆍ이정규 등 원로들은 12월 13일 서울 YMCA회의실에 모여 시국간담회를 갖고, “현재의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또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않으면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조처를 기대한다.”면서 정상적인 민주주의 체제로의 회복은 적어도 ①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② 3권분립체제를 재확립할 것 ➂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4년 1월 7일에는 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과 전 사무총장 예춘호가 공화당을 탈당했다. 정구영은 이날 성명을 통해 “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코자 민주공화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으나, 오늘의 사태는 당원으로서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잃은 채 조국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오랜 자책 끝에 드디어 당과 결별하기로 작정했다.”고 밝히고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날 이희승ㆍ이헌구ㆍ김광섭ㆍ박두진 등 문학인 61명은 ① 헌법개정을 청원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② 우리는 이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③ 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④ 빈부격차가 해소되고 물량위주 대외 의존적 근대화정책이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는 등 4개항의 결의문에 서명하고 발표했다. 


이들은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문학인들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밝히고, “국민의 편에 서서 용기와 신념을 갖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성취를 위해 싸우는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더불어 어떠한 가시밭길도 헤쳐나갈 것을 선언한다.”고 다짐했다. 


박정희는 유신 1년만에 총체적인 국민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