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호방한 기인 임형수

2020.07.21



                호방한 기인 임형수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호방하며 역술과 문장에 능하고 활을 잘 쏘았다. 과거에 응시코자 자신의 금년운세를 짚어보니 합격을 기대할 수 있는 좋은 쾌(卦)가 나왔다. 허나 안타깝게도 노자가 없어 한양까지 올라갈 일이 막막했다. 결국 그는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고향인 나주에서 한양까지의 천리 길을 걸어서 가기로 했다. 도중에 어떤 주막이 보였다.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밥 들어오라고 난리를 쳤지만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난감했다. 그래도 배짱으로 퍼질러 앉아 주인을 넌지시 불렀다. 주인에게 “주인장! 내가 백지 두 권을 줄 테니 밥 두 끼를 해주겠소?” 주인은 이 제의에 선뜩 그러마했다. 당시에는 종이가 귀하여 백지를 대용화폐로 쓸 수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저녁과 이튿날 아침까지 포식을 하고 나니 이제 밥값을 셈할 일만 남았다. 


임형수는 백지 한 장을 접어 이마에 두르고 있다가 주인을 불러 머리를 주인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옛소, 밥값 받으시오!” 주인은 어리둥절해서 소리쳤다. “아니? 백지 두 권을 주겠다더니 이게 무슨 짓이요?” 그러자 임형수는 천연덕스럽게 “이보시오 주인장. 이게 백지 두건(頭巾)이 아니고 뭐요?”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지 두 권이 아닌 백지 두건이라고 우기니 선비의 배짱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백지 두건이 맞기는 맞습니다. 하! 하! 하!”임형수는 중종26년(1531년) 진사가 되고 4년 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ㆍ수찬을 지냈다. 그는 한 때 회령판관으로 있었는데 이틀에 한 끼를 먹거나 아니면 며칠치의 밥을 한 끼에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아랫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전쟁에 나가 이기는 장수가 되려면 이런 습성을 들여야 한다!” 전시에는 때에 맞춰 밥을 먹기가 어렵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는 변방의 오랑케들을 잘 막아내어 성가를 높였고 이런 와중에서도 시 수백수를 지어 북방의 풍물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부제학으로 승진하기도 했는데 성질이 강직하여 남의 잘못을 보고는 참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수렴 청정하는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던 소윤 윤원형에게 미움을 샀다. 그래서 결국 제주 목사로 쫓겨났다가 끝내는 파직 당하고 말았다. 제주도로 좌천되어 갈 때 윤원형은 애주가이자 두주불사인 그를 불렀다. 미워서 쫒아내면서도 원한을 사지 않게 그를 달래려는 속셈 이였다. 권하는 술을 마다 않고 계속 들이키면서도 윤원형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대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술 맛이 더욱 날 텐데... 술이야 얼마든지 마셔주지!” 윤원형은 안색이 변하면서 술 권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비위가 상하고 만 것이다. 윤원형이 불렀을 때 임형수는 스스로의 운을 짚어보고 윤원형이 후에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기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제주목사직에서도 파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배가 너무도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울부짖으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한 중이 염불을 열심히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제각기 목숨을 구하느라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니 임형수는 구차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임형수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중탕! 이중탕! 이중탕!”이라고 외치면서 배 이곳저곳을 웃으며 뛰어 다녔다. 아무래도 임형수가 두려움에 미친 것이라고 판단한 사공이 임형수를 끌어안으며 “사또님 왜 이러십니까? 목숨이 몇 개라고 이 난리를 치는 뱃전을 뛰어다니십니까?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하니 임형수는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으냐? 걱정마라! 이중탕! 이중탕!” 이런 난리를 겪은 뒤 다행히도 배는 무사히 뭍에 도착했다. 


배에 함께 탔던 선비가 물었다. “임목사! 아까 그 난리 통에 외웠던 이중탕 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 물음에 임형수 왈 “아까 난리 통에 나는 무섭기 보다는 멀미가 나서 배가 몹시 아팠소. 그런데 마땅히 빌 말이 없어 배 아픈데 제일 신통한 이중탕을 찾았던 것이요. 나는 나의 명(命)을 알기에 배가 무사히 뭍에 당도할 것을 알았기에 조금도 무섭지 않았소이다!” 제주목사에서 파면당하고 나주 본가에 돌아와 있던 임형수는 끝내 윤원형의 모략에 걸려들어 자신이 예측한대로 명종2년(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양재역벽서 사건의 문장은 이렇다. ‘여주인인 문정왕후가 섭정으로 위에 있고 간신들이 아래에 있어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의 멸망이 곧 닥쳐오리라 이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닐 수 있으랴?’ 이벽서는 사실 소윤(小尹)이 대윤(大尹) 잔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 이였다. 


임형수는 사약을 받고도 태연했다. 태연하게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채 열 살도 안 된 아들을 불러놓고 “글과 벼슬을 해서 무엇 하느냐? 넌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거라. 아니다 글을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할 테니 글을 배우되 절대로 과거시험을 보지 말거라!” 그리고는 사약인 짐주(鴆酒:독약을 섞은 술)를 꿀꺽 마셨다. 사약인 짐주를 열여섯 사발을 마셨는데도 아무렇지 않자 다시 다른 독주를 가져오게 하여 약사발에 잔득 부어 마셨다. 하지만 나머지 독주까지 다 마셔도 죽지 않자 차라리 목이 졸라 죽기를 스스로 원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일에 아무도 나서지 않자 “내가 방에 들어가 올가미 줄을 목에 걸 테니 당신들이 문 밖에서 힘껏 당기시오! 이게 좋지 않겠소?” 이런 아이디어까지 내놓고 방에 들어간 뒤 올가미 줄을 밖으로 내주었다. 


여럿이서 끙끙거리며 끈을 잡아당겼으나 방안에서는 죄수가 죽은 기색은 없고 도리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까지 났다. 금부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올가미는 죄수 목에 걸려있지 않고 창틀에 묶여 있는데 이것을 보고 임형수는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어명인데 이 무슨 망년된 장난이오?” 금부도사가 야단을 치자 “마지막 가는 길에 웃어보자고 한 장난이다. 이 잘난 세상 더 살라고 해도 더 살 재미가 없다. 뭐하겠다고 더 살겠느냐?”라고 한 뒤 스스로 올가미에 목을 걸어 세상을 하직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대담하게 장난을 칠 만큼 호방한 기인 임형수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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