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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萬波息笛(만파식적)

2020.09.07


 


               萬波息笛(만파식적)


 만파식적은 ‘커다란(萬) 파도(波)를 잠재우는(息) 피리(笛)’라는 뜻이다. 만파식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야기가 적혀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로 나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내가 죽거든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에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나를 묻어다오. 나는 죽어서 용이 되어 왜적들이 다시는 신라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겠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아들인 신문왕은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에 못을 만들고 그 못 안에 아버지의 뼈를 모신 수중왕릉을 만들었다. 이곳이 문무왕이 묻힌 무덤이라 하여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이라 하고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고도 불린다. 


 그러던 어느 날 동해를 지키는 해관 파진찬(신라 17관등 중 4위의 직함) 박숙정이 신문왕 2년 임오 5월 초 대왕께 아뢰었다. “문무대왕께서 묻히신 대왕암 저편에 못보던 섬 하나가 새로 떠올라 감은사를 행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다는 절인데 지금은 절터와 석탑만 남아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역술에 능한 일관 김춘걸에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점괘를 짚은 김춘걸은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계십니다. 또한 김유신 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께서 덕을 함께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보내 주시려고 합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을 정도의 큰 보물을 얻으실 겁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나가 그 섬을 살펴보고 사자를 보내 자세히 다가가 살펴보고 보고하라 하였다. 사자가 가서 살펴보니 산 모양은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산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산(섬)도 낮과 밤으로 대나무처럼 둘로 나뉘었다 합쳤다 했다. 사자는 돌아와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감은사에 좀 더 묵고 있는데 이튿날 점심때 나가보니 대나무가 합쳐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어두웠다. 


 그달 16일이 되어서여 바람이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왕이 그제야 배를 타고 그 산(섬)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를 받들어 바쳤다. 왕이 용에게 물었다.(용이 말을 할 줄 아나?)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답하기를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런 값으로는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놀라고(용이 말을 해서 놀랬나?)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용에게 이게 필요할까?)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용과 산(섬)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그날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후에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하례하고는 대왕이 가져온 옥대를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의아해서 물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태자는 “이쪽 하나를 떼어내 물에 넣어 보십시오.” 라 했다. 이에 옥대의 왼쪽 둘째 쪽을 떼내어(이정도로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냇물에 넣으니 금방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이 못을 용연이라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고 풍랑이 심하면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2권 만파식적) 이렇듯 만파식적은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이다. 


 신라는 문무왕 8년(688)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위엄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여기서 종료된 것은 아니다. 나당 연합군으로 이 전쟁에 참여한 욕심 많은 당나라가 이 나라에서 쉽게 물러날리 없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평양 이남의 땅이나마 영토를 회복하고 손상된 자주성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때 당나라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이즈음 국제 정세는 토번이 실크로드를 점령하였고 이에 한반도에 주둔하던 당나라 명장 설인귀가 병력을 이끌고 급히 이를 평정하러 서역으로 떠나야 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신라는 당나라군에 선제공격을 가한다. 나당전쟁의 격전지는 황해도, 경기도 평야지대였는바 이곳은 당나라군이 서해안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공급받기 유리한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의 수로가 가까이 있어 당나라의 보급로 차단이 급선무였다. 처음 전세는 당나라의 압도적 우세였다. 하지만 전쟁에도 운(運)이 크게 좌우하는 법, 거센 공격으로 신라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던 당군의 공격이 갑자기 멈춘다. 


 당나라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때에 서역의 천산지역의 서트르크 궁궐과 아실길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은 소정방을 보내 토벌하게 된다. 궁율은 토번과 연대하고 있어 당은 더욱 긴장했던 것이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코너에 몰리던 신라는 숨을 가다듬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당나라군을 몰아낼 수 있어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렇듯 아무리 군사적 우월성을 지녔어도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운이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중국 본토에서 만약 그런 변란이 연속적으로 생기지 않았다면 당나라는 신라마저 멸망시키고 우리 한반도를 자기들 땅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있어 만약 이라는 가정은 통하지 않지만 세상만사 모두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김유신 이라는 특출난 명장의 도움을 받아 삼국통일(비록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이지만...)을 이룬 문무왕은 죽어서까지 조국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호국정신이 매우 강한 이였음은 분명하다.


 설화속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에도 만파식적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쩍 든다. 그렇다면 민족번영은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인데 아쉽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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