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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사연 많은 역마살 여인

2020.10.02



                              사연 많은 역마살 여인


 예전에 60代로 보이는 초로의 여성분이 필자를 찾았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콧날이 오똑하며 도톰한 입술을 지녀 젊은 시절 한 미모 했을 듯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짙은 화장을 했는데 얼굴에 서려있는 주름살을 보니 인생에 풍파가 많았던 분인 듯했다. 관상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물장사와 관련이 있는 직업에 오래 종사했던 분으로 보였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가녀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걸걸하고 탁한 목소리를 지녔기에 필자의 짐작이 확실함을 느꼈다. 유흥계에 오래 종사했던 여성분들의 경우 오랜 시간 흡연을 해온 경우가 많아 대개는 목소리가 허스키한 특징이 있기에 그러했다. 


생년월일시를 물은즉 1952年 음력 5月 6日生으로 밤 10시경에 태어났다 한다. 고로 사주팔자는 壬辰年· 乙巳月· 乙亥日· 丁亥時가 되었다. 운은 역행하여 甲辰, 癸卯, 壬寅, 辛丑, 庚子, 己亥, 戊戌, 丁酉로 흐른다. 乙木日柱(을목일주)가 하절지 巳月에 태어나 水가 필요한 사주이긴 한데 이분은 년간 壬水, 일지 亥水, 시지 亥水가 있어 지나치게 水가 많다. 물도 적당히 있어야지 나무를 제대로 키우지 지나치게 많으면 이분을 뜻하는 여린 꽃나무 乙木이 물을 다 흡수하지 못해 오히려 도움이 되는게 아니라 뿌리를 썩게 할 수 있다.

 

이런 사주는 지나친 水를 土로 억제(剋·극)해 주거나 火로 힘을 빼주어야(설기) 하는데 이 사주팔자 속에는 연지에 있는 辰土(진토)가 유일한 土인바 辰土는 습(濕)한 흙이기에 제대로 된 제방을 만들 수 없다. 사주팔자가 아주 못생겨진 것이다. 이분의 사주에는 土가 재물인데 이 모양이니 재물이 제대로 모일수가 없고 남편을 뜻하는 金도 없어 재물복 없고 남편복도 없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팔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식복은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 될 수 있다. 자식을 뜻하는 火도 이분의 지나친 水에 시달리는 모습이니 훌륭한 자식을 두겠지만 이분 스스로가 그 복을 걷어 차내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주에 역마살이 많아 평생을 여기저기 떠돌며 보낸 분임을 알 수 있었다.


팔자를 적고 천천히 일람한 뒤 필자 왈 “돈이 들어와도 제대로 고이지 못하고 남편복 또한 없으니 평생을 여기저기 떠돌며 모진 풍파를 겪어 오신 듯한데 그나마 유일하게 자식복은 있으니 다행입니다!” 라고 하니 이분 “휴~~~” 하고 긴 한숨을 쉬시더니 “그럼 그렇지. 제 팔자가 그 모양이니 여태껏 이렇게 살고 있는 거겠지요. 팔자는 못 속인다더니……. 그런데 자식복은 무슨 자식 복이 있다고 하세요? 지 마누라 치마 속에서 꼼짝 못하는 놈인데!” 라고 하신다. 이후 이분은 필자를 자주 찾는 고객이 되셨는데 이분의 사연은 이렇다. 


 이분은 충남 청양 두메산골에서 태어나셨다. 이 동네에는 논은 찾아보기 어렵고 산비탈을 개간해서 만든 천수담이 대부부인 동네였다. 이분 부모님은 산비탈에 얼마 안 되는 밭을 일구어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 양식을 얻었고 틈틈이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서 모아 두었다가 몇 달에 한 번씩 장에 나가 팔아서 콩이나 보리, 쌀 등을 사서 짊어지고 올라와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생활이었다. ‘없는 집에 자식은 많다’는 옛말처럼 자식은 주렁주렁 열렸는데 총 12명의 자식을 낳아 셋은 어려서 마마로 죽고 9남매가 남았다 한다. 그중 이분은 일곱째였다.

 

가난한데다가 학교도 너무 멀리 있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16세경 언니가 일하던 부산 변두리 공장에 취직하게 되어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스무 살 무렵 한 남자를 만나 동거생활을 했는데 남자의 직업이 ‘밤손님’이었다.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란 첫 남편은 어려서부터 손버릇이 나빴는데 이분을 만날 때에는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는데 그 짓을 하다 교도소를 3번이나 다녀온 프로페셔널이었다. 운이 좋아(?) 왕창 털어왔을 때에는 몇 달씩이나 호위호식을 함께하며 꽤나 근사하게 차려입고 전국 유람을 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꼬리가 잡혀 긴긴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으로 첫 남자와는 이별이었다.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

 

20대 후반 무렵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아빠뻘이나 되는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 이분은 제일교포로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는데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예 현지처로 이분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본에는 본처와 자식들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오랜 시간 이분과 결혼생활인지 동거생활인지가 지속되었고 이 남자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하나 두게 되었다. 이른바 ‘첩살이’가 오래 지속된 것이다. 이러다 남편(?)이 암으로 죽게 되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살게 된다.


남편이 암으로 죽기 전 그래도 자기 자식 생각은 했는지 작은집 한 채를 아들 몫으로 남겨 주었기에 이집을 팔아 작은 카페를 차려 호구지책을 삼았다. 장사는 잘되지도 안 되지도 않는 그저 그런 상태였는데 어느 날 한 남성을 만나게 된다. 이 남성은 마카오에 큰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분이 적극 권유하여 마카오에 작은 식당을 개업하고 마카오에 건너가 살게 된다. 마카오에 건너갈 때 친정집에 약간의 돈과 함께 아들을 맡긴다. 식당은 예상외로 잘되었고 식당 옆에 작은 술집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이때 술집 손님으로 드나들던 한 남자를 만나 세 번째 살림을 시작한다. 이 세 번째 남편은 지독한 놀음쟁이였다. 결국 이 남편 때문에 그동안 모았던 전 재산을 탕진한다. 세 번째 남편은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얼굴 들고 살수가 없었던지 약을 먹고 자살해버린다. 


다 털어먹고 한국에 돌아와서 예전에 알고 지내던 ‘아는 언니’ 집에 가서 신세를 지며 언니 가게를 마담 격으로 도와주다 재미교포 남성을 만난다. 10살이나 연하의 남자였는데 남자가 죽고살기 식으로 달라붙어 이런저런 사정 끝에 남자를 따라 LA에 와서 살게 된다. 이때 친정집에 맡겨 두었던 아들도 함께 데리고 건너온다. 

 

네 번째 남편인 이 재미교포는 꽤나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전처가 아이들을 시켜 자꾸 아빠에게 돌아와 달라 호소를 하니 마음이 흔들리던 차 남편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눈치 챈 이분과 갈등을 겪다 대판 싸운 뒤 전처에게 돌아가 버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이 매우 총명하고 착해서 큰 위안이 된다는 점이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분은 ‘아는 게 도둑질’이라고 이곳 LA에 와서도 술집을 쭉 경영했는데 돈이 모일만하면 뭔일이 생겨 모아놓은 돈이 다 새어버리곤 했다. 더 큰 문제는 큰 위안이 되었던 효자 아들을 장가를 보냈더니 이분 표현을 빌리자면 “꼭 여우같이 생긴 못되처먹은 년한테 홀딱 빠져 지애미를 이제는 애미 취급도 안해요!” 였는데 필자가 보기에 사실은 아닌듯하고 아들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다는 홀어머니들이 흔하게 가지는 질투심 이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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