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udowon님의 다른글 더 보기 :: 총 1048
목록 닫기목록닫기 목록 열기목록열기
문화/창작

大道人 북창선생

2021.02.17

 



             大道人 북창선생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식법(호흡수련법)의 원전으로 불리우는 ≪용호비결≫을 지은 북창(호) 정염은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대도인 이시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적인 기질을 보이더니 나이 스물 이전에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외국어 등등을 스승 없이 스스로 배워 통달하였다. 

 

19세 때 과거 (국자시)에 뽑혔으나 이후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중종 때 사람인 선생은 선가의 육통법(六通法)에도 통달하여 산 너머 1백리의 일까지도 통달하였다. 14세 무렵 중국을 관광하였는데 객관에 머물고 있을 때 유구에서 왔다는 도사가 “‘내가 일찍이 운명을 점쳤더니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면 眞人(진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는 점쾌가 나와 지금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선생이 그 진인이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은 즉시 유구말로 주역을 가르쳤다. 그 소식을 듣고 각국에서 온 여러 외국 사람들이 이것저것을 자기네 말로 물은즉 선생은 척척 그 나라 말로 답을 해내니 다들 입을 쩍 벌리고 놀랄 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운명을 묻는데 척척 막힘없이 그들의 지나온 과거와 현재의 사정, 미래의 일 등을 술술 풀어내니 그저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그곳 객관(여관)의 품팔이 나무꾼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오라 불러 관상을 보니 음양의 이치에 통달한 자이기에“네가 어찌하여 객관의 품팔이로 살아가느냐? 네 재주가 아깝도다!”라고 하니“선생께서 저를 알아보시니 역시 만물에 신통하신 분입니다. 저는 촉나라사람으로 제가 저의 운명을 살펴보니 이렇게 살면서 액땜을 하지 않으면 벌써 죽고 말았을 것이기에 이러고 연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대도인이 도인을 알아 본 격이다. 


선생은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두어 말을 마실 수 있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선생은 음률에도 능하여 노끈으로 술병을 묶고 구리 젓가락 하나는 그 속에다 꽂고 다른 하나를 가지고 술병을 두드리면 5음(音)6률(律)의 신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타악기까지 제조해내는 재주였다. 휘파람도 기막히게 잘 불어서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면 신선이 부는 피리 소리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옛적 손등, 완적, 소문 이들 세 명이 휘파람으로 유명했다 하나 정염을 따라 가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평할 정도였다. 정염의 아버지 정순붕은 강원감사를 지내고 정부요직을 지냈는데 아버지 순붕이 선비들을 죽이고 자기가 위훈으로 공신의 명단에 실리고자 꾀할 때 이를 말리면서“이일은 30년이 지나면 반듯이 패할 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 뒤 정축년에 이르러 정순붕의 훈작이 모두 삭제 당하였으니 정확히 30년 뒤였다.

 

선생은 자신의 생사에도 초연하여 이런 일화도 남겼다. 선생의 친구 한명이 병이 위독하여지자 그의 아버지가 북창의 신통함을 알고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북창이 이에 친구의 천명은 다 했으니 자신의 수명 10년을 주겠다고 하며 남산에 올라가 검은 옷, 붉은 옷을 입은 중을 만나면 명을 애걸해 보라고 시켰다. 남산에 오르니 과연 검은 옷, 붉은 옷 입은 중을 만날 수 있었고 명을 애걸하여 10년의 수명을 얻었다. 그 두 중은 남두성(南斗星)과 북두성(北斗星)이었는데 선생의 친구는 병이 나아 10년을 더 살다 죽었고, 자신의 명이 53세인 것을 알고도 10년 명을 친구에게 준 북창 선생은 43세 되는 1549년 명을 다했다. 

 


선생의 명성은 세상에 자자하였으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들 지극히도 꺼렸고 마음껏 노래 부르며 세상을 떠도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내새우지도 않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도 않았다. 남과 더불어 이야기할때도 늘 겸손했으며 단 한마디도 공자의 학문에서 벗어난 말이 없었으니 그 깨달음은 고승 같고 행동은 노자와 같았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는 성인의 예법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선생이 천문, 의약, 율려에 통달했다고 인정하여 장악원 주부겸 관상감, 및 혜민서 교수로 임명하였고 나와서 잠깐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내 그만두어 버리고 고향인 양주로 내려와 세상과는 발을 끊고‘연단화후법’을 수련하였다. 아침에는 입을 꼭 다물고 똑바로 않아서 식사 때를 기다리고, 해가 뜬 연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으며, 밤에도 또한 단정히 앉아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것은 수련 하는데 필요하고 마음 씀씀이를 고명하게 하며 의리를 깊게 하는 수련법이었다. 

 

북창 선생이 산사에 머무르며 수련하고 있을 때 그 절의 주지가 찾아와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이“ 오늘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 술을 갖고 올 것이니 오늘은 술을 먹을 수 있겠다.”고 말을 하다가 갑자기“아깝다. 오늘은 술을 못 먹게 생겼구나!”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하인이 절에 도착해서 하는 말이 술을 지고 오다 고갯마루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술 항아리가 깨졌다고 말하였다. 선생의 도의 경지가 이러했다. 선생은 도의 경지만 높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실함이 진중하고 예의 바르며 항시 올 곧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세상의 부귀영하와 삶과 죽음에 초연한 진정한 대도인(大道人)이였다. 선생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었으며 자신의 죽는 날까지 예언하고는 단정히 생을 마치었다. 죽을 날을 맞이하고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홀연히 호흡을 멈추었다. 이승에서의 삶에 별 애착이 없던 도인의 마지막이었다. 양주 사정산에 북창선생의 묘가 있다 한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