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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백운학의 천기누설

2021.03.29

 

               백운학의 천기누설   


 청도지방 어려운 집에 태어나 궁핍한 생활을 하던 백운학은 이대로 있다가는 딱 굶어죽기 십상인지라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재주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이것저것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이집 저집 다니며 탁발을 하는 유랑걸승을 만나게 된다. 백운학이 이 유랑객승의 하는 양을 가만히 보니 당시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운 판이라 집 앞에서 양식을 청하며 목탁을 두드려도 잘 응대해 주질 않았다. 이때 집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 “저 아이는 장차 OO감이니 어릴때부터 그쪽방향으로 가르치면 좋겠군요!” 라든지 새댁을 보고 “명년 O월쯤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다” 라는 등등의 아는 소리를 하면 순간적으로 대우가 확 바뀌어서 잘 대접해 주는 것이 아닌가! “아 하! 나도 이걸 배워 먹고살아야겠다!” 결심을 한 백운학은 조르고 졸라 결국 관상학을 배우게 되는데 스승이 사람들의 얼굴을 감평 할 때 한 눈을 감고 한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 바 한눈으로 보면 그 얼굴의 상이 좀 더 세밀하고 정확하다는 답을 듣고 송곳으로 자신의 한 쪽 눈을 찔러버렸다. 


결국 애꾸가 된 백운학은 무서운 열정과 노력 끝에 끝내 조선제일의 관상가가 된다. 이 백운학이 어느 날 한양에 볼일을 보러 올라왔다가 지나가던 중 우연히 운현궁(흥선대원군 이하응 자택)앞을 지나다 마당에서 팽이치기를 하고 있던 한 소년을 보았는데 이이가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이 명복이었다. 명복을 보는 순간 백운학은 전기에 감전 된 듯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왕의 상을 갖춘 소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운학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아이(훗날 고종)는 웬 애꾸아저씨가 자기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자 이상스러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 광경을 보고서 백운학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연유를 물어보니 백운학 왈 “저 분은 제왕의 상을 지닌 분이어서 훗날 틀림없이 제위에 오르실 분이어서 제가 그리 행동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이 말을 듣고 짐짓 불같이 화를 내며 “이놈 어디서 쓸데없이 큰일 날 말을 지껄이느냐?” 고 하였다. 이때 흥선 대감(살아있는 왕의 아버지를 대원이라 칭하므로 이때까지는 흥선군으로 불렀을 뿐 아직은 대원군이 되지 못했을 때이다)이하응은 후사가 없던 강화도령 철종 사후를 대비하여 궁중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를 상대로 은밀히 집권전략을 세우는 운동이 한참이었다 당시 안동김씨 세력이 정권을 농단하던 시대(철종시대)라 왕족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세상이어서 그들 눈에 거슬리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는지라 대원군이 속을 감추고 이렇게 야단을 친 것이다. 이에 대해 백운학은 “두고 보십시오. 3년 안에 저분이 제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이집 형편을 보아하니 복채는 그때나 되서 받으러 오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삼 십 만 냥에 비단 세 수레 정도는 복채로 내 놓으셔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대원군 역시 “그리된다면야 약속을 지키겠네!” 라고 약속하였다. 


그 후 백운학의 말대로 3년이 채 못 되어 명복이는 임금이 되었고 백운학은 당당히 대원군 이하응 대감 집에 찾아와 복채로 삼십 만냥과 황소가 끄는 세 수레분의 비단을 받았다. 이에 더하여 보너스로 청도 현감 벼슬까지 받아 금의환양(錦衣還鄕)하게 되었다. 아마도 백운학이 받은 복채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큰 액수의 복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하응은 비록 왕족이기는 하나 영락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고 김씨문중의 잔칫집을 기웃거리며 먹을것을 동냥해야 하는 처지여서 김씨문중 사람들에게 ‘상가집 개’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통할 정도로 영락한 처지라 사실 작은 돈의 복채라도 내줄만한 형편이 되질 못했다. 당시 돈 30만냥이면 지금 돈으로 치면 수십억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는데 백운학은 비록 후불이지만 이런 거액을 태연히 요구하였다. 


백운학의 요구로 지금의 약속어음과 비슷한 증서를 백운학에게 써주었다. 이때는 사실 대원군 이하응이 궁중을 몰래 드나들며 대왕대비에게 자신의 존재를 은연 중 부각시키던 중이였고 큰 야심을 숨긴 채 일부러 김씨문중 잔치 대소사에 나타나 주책을 부림으로써 김씨문중 사람들이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여겨 경계의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치밀한 계획을 진행중인 민감한 때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3년후 백운학은 복채를 받으러 운현궁 대원군 집에 나타난 것이고 이때는 백운학이 예견한대로 명복이는 고종임금이 되어있었고, 대원이 대감 이하응은 수렴청정하는 사실상의 임금이 되어있었다. 대원군은 약속한 30만냥보다 몇 배 많은 돈을 백운학에게 주려하자 백운학은 30만냥만 받겠다고 고집하며 호의를 베푸시려면 자신의 고향인 청도현감벼슬을 달라고 요구하였고, 대원군이 준 벼슬을 가지고 고향 떠난 지 수 십 년 만에 금의환향을 하게 된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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