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언니 - 짜장면집 처녀사장 -
사람들에게 '왕언니'로 불리는 왕 여사님은 모든 것이 넉넉하신 분이다. 우선 풍채가 넉넉하다. 그리고 풍채에 걸맞게 마음도 넉넉하다. 매우 낙천적이고 오지랍이 넓어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챙긴다. 늘 자기일 보다는 남의 일로 바쁘다. 항상 사람 좋은 웃는 얼굴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여걸의 풍모에 알맞다. 왕언니는 왕씨라는 성씨 에 걸맞는 직업을 가졌다. 중국집 사장님이시다. LA와 얼바인, 샌디에고에 중화 요리집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화교다. 그리고 성씨가 왕 씨이거나 왕 씨와 연관되어 혈연관계가 구성된 가깝던 멀 던 친척들이다. 그러니 십 여 년이 지나도 종업원의 변동이 거의 없다. 자기들끼리는 반드시 중국말로 떠든다. 청소나 주방에서 잔심부름 하는 멕시칸 외에는 절대로 타 인종 사람을 안 쓰고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끼리만 해 먹는다.
화교들의 단결심은 알아줄만 하지만 왕언니네 왕씨 패밀리는 더욱더 견고하다. 왕언니는 처음 서울의 중국인 촌으로 불리운 북창동에서 살았다. 홀아비인 아버지의 외동딸로 화교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이곳에서도 아버지는 산뚱반점 이라는 짜장면 집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때 이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전국으로 흩어졌다. 가까운 곳 먼 곳 가리지 않고 흩어졌다. 저 남쪽 진도와 완도, 심지어 신안의 작은 섬에까지 흩어졌다. 이때 왕언니의 아버지는 끝내 고집을 부리며 서울에 남아 충무로 한 귀퉁이에 중국집을 지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억울함과 지나친 과로로 인해 결국 쓰러졌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때 왕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집으로 뛰어와야 했다.
아버지는 카운터에 앉아서 삐뚤어진 입으로 열심히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를 외치며 계산을 맞췄고 왕언니는 홀과 주방을 날듯이 왔다갔다하며 써빙도 하고 종업원 감독도 했다. 이때 손님으로 온 한 청년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청년은 인물도 좋고 집안도 교육자 집안이여서 꽤나 괜찮은 조건임에도 아버지는 무조건 교제를 반대했다. 이유는 그가 중국인(화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죽어도 같은 중국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이었다. 청년 집에서도 반대했다. "짜장면은 맛이 있지만 짱꼴라 며느리는 싫다!" 양쪽 집안에서 다 반대했지만 청춘남녀의 불붙은 열정을 어느 누가 말리겠는가?
둘은 가출을 감행해서 지하 월세방에 살림을 차렸다. "애가 생기면 양쪽 집안 부모님도 어쩌랴? 우선 애를 낳아서 애기를 앞세우고 밀어 붙이자" 라는 합의하에 저지르고 본 일이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이는 통 생기지 않았고 딸의 가출에 상심하고 폭음을 일삼던 왕언니 아버지는 몸져 누웠고 병이 깊어져 다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언니, 더 버틸 수 없어 눈물 콧물 흘리며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간호하게 된다. 다 죽게 된 마당에서도 왕언니 아버지는 "절대로 죽어도 같은 나라 사람 아니면 결혼해서는 안된다" 고 고집했고 왕언니는 왕언니대로 "지금 사귀는 사람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 고 버텼다. 목숨을 건 비장한 싸움 같았던 것이다. 결국 왕언니 아버지는 회복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고 왕언니는 자신의 불효에 몸을 떨었다.
왕언니가 초상을 마치자 왕언니 애인은 득달같이 달려와 이제 방해물도 사라졌으니 결혼 하자고 서둘렀다. 헌데 그래서는 안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르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왕언니 애인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고 어떡하든 왕언니를 데려가려 했지만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를 놔두고 이 땅을 떠난다는 게 마음에 걸려 울며 애인을 혼자 보냈다. 그 후 시간이 지나자 애인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한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 LA에 살고 있던 애인을 찾아보니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가정을 꾸려 이쁜 남매를 낳고 살고 있었다 한다. 애인의 행복한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섰다했다. 부디 행복하기를 빌어주면서... 이후 왕언니는 독신주의자가 되었다.
성격이 넉넉하고 인정이 많아 남 돕기를 즐기다보니 주위에 항시 사람들이 많이 들끓었다. 중국인 커뮤니티, 한인 커뮤니티 양쪽을 오가며 많은 친구, 후배들을 사귀었다. 왕언니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가업을 이어받아 '한국식 중국집'을 이어갔다. 처음 LA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샌디에고에 하나 더 오픈했고 끝으로 얼바인에도 지점을 열었다. 꽤나 규모가 있는 음식점을 3곳에서 운영하려니 사람도 많이 필요했고 자금도 많이 필요했다. 종업원은 '그래도 믿을 것은 핏줄밖에 없다'는 말에 따라 한국에 있는 화교친척이나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본토에 있는 친척들을 불러 모았다. 3곳의 식당에 영업사장을 한명씩 앉혀놓고 왕언니는 총괄을 했다. 영업은 생각보다 훨씬 잘되어 3곳 식당 모두 항상 손님들로 복작복작 했다.
돈 많은 처녀(?) 사장님인 왕언니는 비록 덩치가 커서 옛날 뚱보 연예인 백금녀를 연상 시키지만 그래도 주위에서 구애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왕언니도 젊은 여자인지라 이 남자 저 남자와 로맨스도 뿌리곤 했지만 일정 선에서 정리하곤 했다. 필자가 이런저런 남자와 왕언니의 사주를 대조하여 궁합을 봐주곤 했지만 항상 결혼을 목적으로 궁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의 배합이 맞는지를 보는 것이라 하곤 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50대를 넘어선 왕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시 인기 만점인 말 그대로의 '왕언니'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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