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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한 번 죽어 영원히 살다.

2021.07.22

 



          한 번 죽어 영원히 살다.


 필자의 지인 K씨는 매우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분이다. 이분은 한국에 계실 때 국무총리실 사무관으로 요직에 근무하던 분이다. 7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여 (당시 4급) 짧은 기간에 사무관까지 승진시험을 통해 올라섰다. 부인은 당시 모 여고 음악선생 이었고 슬하에 외동딸 하나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불행은 도둑과 같이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온한 가정에 새벽을 틈타 들이닥친 3인조 강도에 의해 집에 있던 현금과 귀금속 모두를 털린 것은 물론 가족들의 영혼까지 파괴되어 버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부인과 딸이 능욕당하는 것을 보아야만했다 한다. 가정 파괴범인 이 떼강도 들은 그 후 체포되어 엄한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파괴된 가족들의 영혼은 어디에서도 구원받을 길이 없었다. 


그때 강도들이 아무리 날이 시퍼런 칼을 목에 들이대고 있었어도 K씨는 대항 했어야 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죽더라도 그리 했어야 했다. 하지만 K씨는 그러지 못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던 과거를 필자에게 만 털어놓으면 K씨는 한없이 울었다. K씨의 특별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저녁식사를 겸한 상담 내내 K씨는 음식에는 젓가락 한 번 대지 않고 내내 소주만 들이키 다가 털어놓은 사연이다. K씨는 그때 죽었어야 만 했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목숨 걸고 대항하지 못한 것이 영원히 K씨의 영혼을 파괴한 것이다. 10여년도 넘은 그날의 K씨의 아픔이 지금도 필자에게는 선하게 전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K씨도 결국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수없이 계속된 번뇌의 불면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때 K씨는 죽었어야 했다. 억울하지만 그랬어 야 했다. “사내가 죽을 자리를 놓치면 영원히 죽는 다” 라고 하던 군인이었던 모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生死의 순간에 겁이 나서 또는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義(의)를 버리고 비겁의 生(생)을 택한 이들이 그 후 죽을 때 까지도 후회하며 자신을 경멸하며 살아온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에 (의를 위해 死를 택해야만 하는)처해 지지 않음을 고맙고 다행스레 여겨야 하지만 만약 그런 순간이 닥친다면 과감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영혼에 대한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역사의 한 사실을 보자. 


1592년 일본 열도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들끼리의 파벌 싸움에서 패배한 지방 영주들의 사병들을 소모시킬 필요가 있었다. 넘쳐나는 영주들의 사병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으킨 것이 임진왜란 이다. 급작스런 왜군의 침략을 당한 조선은 신식무기 조총을 앞세운 왜군들 앞에 속절없이 쓰러져갈 뿐이었다. 왜군은 조선관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수없는 파괴와 살상을 일삼았다. 거칠 것 없이 한반도를 유린하던 왜군이 반도의 중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성 금산에 도착하였다. 금산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길목이었다. 관군은 금산 성문을 굳게 닫고 죽기 살기로 항전하였다. 이때 무너진 관군을 대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의병장 조헌은 1600명의 의병을 모아 당시 왜병에게 점령 되었던 청주 성을 되찾는 전공을 세운 뒤 금산소식을 듣게 된다. 


충청감사는 조헌에게 도움을 청한다. 금산소식을 전하며 금산이 점령될 경우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호남이 위험해 지니 곧 지원군을 보낼 터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산이 점령되지 않도록 왜군의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펴 발을 묶어 두라는 요청이었다. 조헌은 승려 영규가 이끄는 수 십 명의 승병을 포함한 이리저리 뜨내기 의병들을 이리저리모아 겨우 700명을 채워 금산으로 향했다. 온양에서 출발해 이십일 만에 금산에 도착한 조헌의 의병대는 금산성 북쪽 경양산에 진을 쳤다. 그리고 영규는 승병을 포함한 일부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성 서쪽 한 야산에 매복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후원군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싸움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금산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왜군에게 점령될 것이고 호남 지대는 왜군의 손에 떨어져 적들의 군량미가 되고 아군의 군량 공급은 끊어져 국가가 도탄 될 위기였다. 


이때 고심하던 조헌이 칼을 치켜들고 부하들에게 외친다. “왜놈들의 군세로 보아 지금 왜적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아마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단 한명도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가망성이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이 싸움을 우리가 어찌 회피하고 목숨을 아까와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목숨을 바쳐 왜놈들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관군이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국가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따라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여 평생 부끄럼 속에 살 것인가?” 이 당시에는 십대 중후반이면 결혼을 하는 조혼 풍습에 따라 당시 의병 대부분은 처자식이 딸린 몸이었건만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기꺼이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섰다. 즉 죽으러가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조헌부대는 북쪽에서 영규부대는 서쪽에서 동시에 왜군을 향해 돌진했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고 무장도 형편없는 오합지졸인 의병들이였지만 자발적인 죽음을 택한 이들이었다. 네 번에 걸친 공격 끝에 왜군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히고 700의병은 모두 빠짐없이 깨끗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이 싸움은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사기를 꺾어놓았고 결국 호남진출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700명의 의로운 사내들 덕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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