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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이지함과 토정비결

2021.10.06




                             이지함과 토정비결


 토정(土亭)이지함은 중종 12년 (1517년)에 태어나 선조 11년(1578년)에 사망한 실존 인물이다. 아버지가 사화(士禍)에 휘말려 어린토정을 두고 사망하자 형인 지번 밑에서 자랐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수리, 의학, 복서, 천문에 능통하였다. 토정은 마포강변의 움막집에 살며 틈틈이 전국을 주유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다. 그는 <월령도>와 <현무발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심오하고 깊어 지금까지도 해독하는 이가 없다한다. 성리학의 대가로 당대의 최고였던 조식이 마포의 그의 집을 찾아와 만나본 뒤 그를 도연명에 비유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능해 사람의 앞날을 훤히 안다는 소문이 퍼져 운명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이가 늘고, 1년 신수를 보아달라는 부탁이 많아지자 이를 감당치 못하자 스스로 1년 신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지은 책이 토정비결(土亭秘訣)이다. 토정은 물질에 욕심이 없어 늘 청빈하게 살았는바, 결혼 초례를 치룬 다음 날 거리에 나갔다가 추위에 떠는 거지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새 도포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고 돌아와 처갓집 식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제일 존경하던 스승은 이름도 없이 강변에서 고기 잡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어옹(漁翁)이였고, 가장 사랑한 제자 역시 서무치, 서기, 두 사람도 천한 신분이었다. 


토정이 조선시대 양반으로는 보기 드문 장사를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장사를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당시 토정선생의 선조의 묘가 바닷가에 있었는데 천문을 짚어보니 머지않은 장래에 큰 해일이 일어 묘가 조수에 쓸려나가는 것이 예견 되었다한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큰 제방을 쌓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장사에 손을 댄 것이다. 앞일을 예견하는 것에 탁월했던 토정인지라 손대는 것마다 큰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제방을 쌓았으며 제방 때문에 생겨난 개간지에서 생산되는 수천석의 쌀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어 칭찬이 자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은 가난하여 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한다. 자기 먹을 것도 없이 전부 나누어 주었나보다. 


토정은 다 늙어 나이 60이 가까운 선조 6년 (1573년)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지금의 포천지방) 현감에 임명되었다. 토정은 임진강변에 개척사업으로 기름진 땅을 얻을 수 있고, 이를 잘 활용하면 굶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판단, 이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이로 인해 손해를 볼 수 있는 양반들이 이를 막아 상소가 기각되자 즉각 사임해 버렸다. 1578년 다시 아산 현감에 등용되었는데 부임하자마자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걸인들을 구제하고 노약자와 부랑자들을 구호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전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관내를 매일 빠짐없이 시찰하여 백성들이 무고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급 관리를 엄하게 관리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일종의 기술학교까지 세운 것이다. 백성들 편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추진한 청백리 토정 이지함이 크게 노한 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탐학이었다. 


당시 아산에는 조정에 상납하는 잉어를 기르는 양어장이 있었는바, 조정이나 그와 관련된 중간 관리자들의 탐욕이 심하여 조정에 들여보내는 양보다 중간 벼슬아치들에게 바치는 고기가 더 많을 정도여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니 백성들의 허리가 휘어만 갔다. 나중에는 기르는 수보다 바쳐야 할 잉어의 수가 많은 지경에 이르자 현민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때 토정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바치는 잉어의 수를 줄여달라는 소극적 청원이 아니라 양어장 자체를 메꿔 버렸다. 그러고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아산에는 이제 양어장이 없으니 더 이상 잉어를 바치지 못하겠다고 보고해 버린 것이다. 목숨을 건 대단한 결단이자 탐관오리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와 연관되어 있는 벼슬아치들은 사색이 되어 난리가 났다. 까닥 잘못하면 죄다 모가지 감이였기 때문이다. 토정을 벌주려면 자신들의 치부가 들어날 것이기에 전전긍긍하며 토정을 벌하지 못하였다. 토정의 애민정신이 이러했다. 토정의 제자 중 특히 영특했던 제자가 있었는데 조카 이산해였다. 토정은 자신의 조카보다는 다른 천인출신인 서무치와 서기를 더 사랑했지만, 이들은 신분의 제약 때문에 벼슬을 하지 못했다. 이산해는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르는데 그는 글에서 자신의 삼촌을 이렇게 기록했다. “세상에서는 토정선생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의 외견만 보고 기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재간, 견식, 덕량, 행실은 능히도 세상을 구할 대기(大器)였다” 이것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진 글이다. 


토정이 62세 되는 어느 날 갑자기 이질에 걸렸다. 그리고는 허망하게 바로 죽고 말았다. 이에 아산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자식들 마냥 슬퍼하고 거리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성이 가득하였다. 토정 이지함이 지은 토정비결은 단순한 점서가 아닌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할 것이다. 유교, 불교, 도교 무속에 입각한 인간의 행동준칙을 설명한 부분이 많아 매우 교훈적이고 가능한 한 불운보다는 행운을 서술하는 부분이 많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에 큰 목적을 둔 것이어서 이 역시 토정의 애민사상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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