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은 唐(당)과의 인연
드라마 사극에서 보면 고승으로 나오는 스님들이 어떤 누군가와 헤어질 때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라는 멋진(?)대사를 하며 홀연히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인연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평생 살며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모두 인연법에서 연유한다. 이승에서 옷깃만 스쳐도 그이와 나는 전생의 숱한 긴 사연을 지녔다했는데 자신의 부모 형제나 배우자 자식과의 인연은 얼마나 깊고 깊었던 인연이었겠는가! 세상사 무엇이든 다 인연이 닿아야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 안타까이 마음 졸이고 애쓴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신라시대 때 경상북도 경산의 지방관리 집에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후에 이분이 원효대사로 불리는 이다. 설씨 집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관리로 지냈고, 이 아기의 이름은 서당이라 지어졌다. 설서당이 그의 본명이다. 원효가 태어난 시기는 신라왕실이 불교를 적극 권장하고 있었고 승려가 사회적으로 큰 권위를 지닐 수 있었기에 지방 출신인 원효는 출세하려는 욕심에 어린나이에 일찍 출가를 하게 된다. 원효가 출가하던 그 시기는 태종무열왕(654~661)때였고 왕실은 엄격한 골품제에 의해 진골귀족에 의해 운영되는 신분제 사회여서 시골관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원효 같은 인물은 아무리 똑똑해도 출세에 한계가 있기에 벼슬길이 아닌 다른 길로의 출세를 모색한 것이다.
이때 신라 승려들의 꿈은 당나라 유학이었다. 당나라 유학은 벼슬길에 오르는 것 만큼이나 영광이었다. 야심찬 원효도 38세 때 후배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60년 70년대에 미국이나 유럽유학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고 대학생들의 로망 이었듯이 당시 신라 승려들 에게는 당나라 불교 유학이 꿈이었던 것이다. 육로로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고승인 현장법사와 규기에게 불법을 배우려는 계획이었다. 육로로 당나라 까지 가려고 고구려 국경선을 넘어 요동지방 까지 갔지만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혀 간첩으로 오해받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신라 땅으로 돌아왔다. 죽을 고생을 했고 목숨까지 위험 했지만 원효는 다시 의상과 의기투합하여 10년 뒤 당 유학을 재시도 한다. 끈질긴 집념이다.
이번에는 바닷길을 통해 당에 가려고 서해안에 있는 포구인 당항성 으로 발걸음을 독촉했다. 경주에서 출발해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필자의 고향이기도 하다)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날은 어두워져 둘은 부득이 인가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한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헤프닝 이 벌어진다. 춥고 배고프고 지친나머지 기절 하다시피 웅크리고 누워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심한 갈증으로 깨어나게 된다. 물을 찾으려고 어둠속에 손을 더듬거리는데 마침 큰 바가지가 손에 잡혔고 그 속에 담겨있는 물을 달게 단숨에 마신 뒤 다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나 보니 해골바가지 안에 들어있던 해골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구토가 나와 한참이나 토악질을 하던 원효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다.
밤중에 그토록 달콤했던 자신의 갈증을 달게 해갈해 주었던 그 고마운 물의 실체를 아는 순간 구토에 토악질이라니? “역시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구나!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가 이런 이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이 순간 원효가 그토록 갈망했던 당나라 불교유학은 무의미해졌다. 자신의 일생의 꿈이었던 당나라 유학이 이제는 하찮은 욕심으로 여겨졌다. 의상이 짐을 꾸려 선배인 원효에게 길을 재촉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후배 의상에게 자신은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겠으니 혼자 다녀오라고 한다.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어디에 있든 깨우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였다. 결국 의상혼자 당나라 유학을 떠났고 원효는 신라 땅에 남아 깨달은 자를 만나러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신의 인연들을 물 흐르는 듯이 찾아 나선다.
당과는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다. 이후 원효는 허름한 술집에서 술집 요부들과 희희덕 거리며 술 마시기를 즐겼고 가야금을 들고 사당에 가서 술을 마시며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여 미친놈 소리를 밥 먹듯이 들었고 거지들의 움막 촌에서 지내는가 하면 혹은 귀족의 집을 찾아들어 호화로운 삶을 즐기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산속 깊은 동굴이나 암자를 찾아가 참선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승려가 지켜야 할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규율을 스스럼없이 깨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른바 무애(無碍)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무애는 진실로 깨달은 고승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경지인데 이후 오랜 세월 현재에 이르기까지 돌팔이 땡 중놈들이 술 처먹고 기집 질하고 시주 돈 빼돌려 치부하면서 고승인양 이런 방탕질을 커버하려고 무애의 경지를 흉내 내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원효는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아들 설총을 낳았는데 이는 원효가 “누가 자루를 뺀 도끼를 빌려주면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겠노라!” 라는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자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들고 ‘원효가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고 싶다’ 는 뜻으로 해석하고 마침 과부가 되어 외로이 홀로지내는 자신의 딸 요석공주와 다리를 놓아 둘이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원효는 평생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사람이여야 편안함을 얻는다” 는 주장을 하며 그렇게 살았고 그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무애가(無碍歌)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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