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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결혼으로 연거푸 팔자를 확 고친 남자

2021.12.09




                         결혼으로 연거푸 팔자를 확 고친 남자    


 필자가 평소 상담을 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떡하면 팔자를 바꿀 수 있죠?” 또는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합 필자의 대답은 20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인간의 힘으로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고,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의 힘을 빌려서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종교입니다.”이다. 그 이유는 결혼하는 순간 남녀는 그때부터 한 운명체가 된다. 즉 니 팔자 내 팔자가 아닌 우리 부부 공동의 팔자, 공동의 운명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쎄커터리 분 들이 상담 예약을 잡을 때 “부부는 운을 공유하기 때문에 부부의 경우 두 분의 운을 함께 보아야 운명진단이 정확해 집니다.” 라고 하는 말을 자주 하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항시 상담 스케쥴이 넘치기에 일부러 상담하시는 분 한명을 추가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는 부모 자식도 엄연히 1촌이라는 촌수가 존재한다. 즉 운을 공유(共有)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부는 무촌(無寸)이다. 한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은 팔자를 바꾼다. 좋게 바뀌든 나쁘게 바뀌든 결혼하는 그 순간 팔자는 바뀌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송유인이라는 잡놈이 살았다. 인물 좋고 체격도 당당한데다가 언변 또한 뛰어난 한량이었다. 집안이 한미하여 어릴 때부터 시장 통 건달패들과 어울리며 개망나니 짓을 하며 살았다. 인물과 체격, 언변이 좋으니 여자들에게 늘 인기가 있었고 여러 계집과 난잡하게 교접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고려시대 때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가 자유롭고 성 풍습이 개방적인 시대여서 가능했다. 


같은 동네에 송나라 거상(巨商) 서덕언의 첩이 살고 있었다. 서덕언은 도강(都綱) 또는 강수(綱首)로 불렸는데 도강이란 대외 무역시 선박과 화물을 직접 소유하여 입항하는 선주(船主)를 말하며 필요에 따라 사신의 임무를 대행하기도 하는, 일반 상인이 아닌 매우 부유한 거상이기에 지금의 재벌쯤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서덕언의 고려국 현지처는 첩들이 그렇듯 이런저런 아양을 떨며 이쁜짓(귀요미)을 하며 간롱을 떤 끝에 큰 재산을 뜯어낼 수 있었다. 늙어 쪼그라든 서덕언은 더 이상 사내구실을 못했고 둘은 거의 결별 상태나 마찬가지 일 때 그녀의 눈에 젊고 잘 생기고 체격 좋은데다가 언변까지 좋은 송유인 들어왔다. 둘은 금방 불이 붙었다. 송유인은 ‘돈 많은 그녀’를 얻음으로서 자신의 출세에 필요한 튼튼한 경제적 기반 즉 돈줄을 쥐게 되었고 천출 이었던 그녀역시 돈만 많았지 외로운 생과부 신세여서 송유인의 젊은 육체가 필요했다. 여자로서는 비록 다소 늙었지만 아직도 정념이 살아있었다. 


송유인은 이 결혼으로 팔자를 고쳤다. <고려서>128권, <열전>41권 정중부, 송유인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송유인은 처음에 송나라 상인 서덕언의 처를 부인으로 얻었는데 그 처는 본래 천한출신(천출)이나 수만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송유인은 백금(은) 40근을 환관에게 뇌물로 주고 3품직을 얻었다. 의종 말렵에는 대장군이 되어 문관들과 많이 교류하니 같은 무관들이 그를 많이 미워했다. 그때 무신난이 나서 정중부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송유인은 스스로 고립되어 위태함을 느끼고 화가 몸에 미칠까 두려워하며 그의 처를 섬으로 내쫓고 정중부의 딸을 얻어서 처로 삼았다> 당시 은 한 근이 쌀 50여석이었으니 송유인이 환관에게 쓴 은 40근이면 쌀 2,000여석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웬만한 고을의 1년 조세 수입에 버금가는 큰 액수였다. 아무튼 송유인은 ‘돈 많은 그녀’ 덕에 뇌물을 바치고 비록 무관직 이지만 벼슬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무관직은 출신 성분이나 학식 등을 크게 요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문(文)을 숭배하고 무(戊)를 천시하던 때여서 문관들이 무관들을 매우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무신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무신 난 이였다. 송유인은 뇌물로 벼슬을 얻고 난 뒤 약삭빠르게 시류에 쫓아 같은 무신들을 무시하고 문신들에게 뇌물을 써가며 아첨하고 교류하였다. 이에 무신들이 송유인을 미워했던 것이다. 이때 무신난이 일어나고 정중부가 정권을 잡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송유인은 처를 한번가면 돌아오기 어려운 먼 섬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정중부의 딸을 꼬시기 시작했다. ‘돈 많은 그녀’는 소박을 당한 것이다. 그 많은 돈으로 호사나 누리며 살면 그만일 것을 다 늙어가지고 그깟 정념을 못 이겨 젊은 건달하나 들였다가 결국 배신당하고 쪽박을 찬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여인들 참 많다. 아무튼 송유인은 엄청난 뇌물을 싸들고 정중부의 집을 드나들며 자신의 특기인 잘생긴 얼굴과 당당한 체격, 화려한 언변으로 정중부에게 잘 보이고 정중부의 딸과 교류하여 그녀를 정복 하는데 성공한다. 정중부의 사위가 된 것이다. 정중부의 사위가 된 송유인은 다시 한 번 팔자를 바꾼 것이다. 재빠른 기회주의자 송유인은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해서 추밀원부사 병부상서라는 요직에 까지 승진한다. 이 자리는 병력동원과 무관선발 등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지금의 국방부 장관 격이니 그 위세가 당당했다. 송유인의 권세는 하늘을 찔러 국왕의 별궁인 수덕 궁 까지 빼앗아 궁궐에서 기거를 했을 정도다. 


고려사절요12권 명종 8년 11월에 보면 <송유인이 일찍이 수덕궁을 청해 얻어서 거주하니 가옥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실로 신하된 자가 살집이 아니었으며 부귀와 호위가 왕실에 비길만했다> 라고 적고 있을 정도다. 정중부와 송유인의 지나친 뇌물수수와 비리, 강압에 의한 관리인사 조치와 정적탄압, 왕명을 무시한 월권행사 등으로 정중부 정권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고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임금을 겁박하여 공주와 결혼해 척신정치를 꾀하려고 왕에게 딸을 내놓으라고까지 교만 방자함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보다 못한 청년장군 경대승이 칼을 뽑았다. 정중부와 송유인은 경대승이 주도한 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도망쳐 민가에 숨었지만 곧 금군에게 체포됐다. 경대승은 이들을 베어죽이고 저자에 머리를 효시했다. 무신정변이 있 은지 꼭 9년만의 일이였다. 첫 번째 결혼을 통해 돈줄을 잡아 팔자를 고치고 두 번째 결혼을 통해 권력의 줄을 잡아 팔자를 고쳤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처남 정균이 공주와 결혼해 팔자를 고치려한 사건으로 목이 잘려 효시되는 팔자가 된 사내의 ‘결혼을 통한 팔자 고치기’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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