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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治天下之 大頭領 (치천하지 대두령)

2022.01.12

 




               治天下之 大頭領 (치천하지 대두령)  


 故 박정희 대통령의 인생전체를 쥐고 흔들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측근중의 최측근인 모씨에게만 은밀히 토로했던 이야기로 이 아주 작은 사건이 박정희란 인물의 일생을 바꿔 놓았고 역사를 바꿔놓았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만주 신경에 지인을 만나러 나선 길이였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 어떤 사정인지 지인은 오지않고 시간은 지체되고 있었다. 시간을 떼우기 위해 약속장소 근처를 할 일 없이 어스렁 거리고 있는데 길모퉁이에 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어떤 이가 그를 불렀다. 사주 관상책을 쌓아놓고 지나가는 행인을 상대로 사주나 관상을 보아주는 영감이 였는데 보아하니 체구는 삐쩍 말라 비루먹은 강아지 새끼 같았고, 이빨은 죄다빠져 영 볼품없는 늙은 영감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다급한 듯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영감의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자 이 볼품없는 영감 아무소리 없이 돋보기를 들고 박정희 청년 얼굴에 여기저기 드리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감탄을 하더니 생년월일시를 대라고 성화다. 같잖은 마음에 무시하고 일어서려다 마침 시간도 있고하여 생년월일시를 대주었다한다. 관상과 사주팔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 영감은 아무 말 없이 종이에 한 문장을 썼는바 ‘治天下之 大頭領’이라는 문구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큰두령’이니 아주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볼품없는 영감이 막걸리 값이라도 벌려고 별 아부를 다하는구나!’ 싶었지만 어쨌든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어서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이일을 잊어버렸다. 후에 불현듯 어떤 사건에 의해 이 기억이 되살아 날 때까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일본군 소위가 되자마자 얼마 안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졸지에 광복이 되자 실업자신세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가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군인으로 복귀한다. 대구사범 졸업 후 긴 칼 차고 말을 탄 장교군인이 되어 금의환향하고 싶어 만주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다시 정식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드디어 고국에 돌아와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된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사관학교 졸업은 박정희의 특이한 선후배 관계를 형성한다. 후배가 선배가 되기도 하고 선배가 후배가 되기도 하는 복잡한 선후배관계다. 형제 중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고 믿고 따랐던 셋째형 박상희가 좌익에 몸담고 있던 중 대구 폭동사건 때 경찰의 총에 맞고 사망하자 그 반발심으로 좌익사상에 호감을 갖던 중 박상희와 친구였던 이재복 에게 포섭되어 이런저런 좌익인사들과 어울리다 어영부영 정식 입당 절차도 없이 남로당 남한군사총책의 역할을 하게 된다. 


박정희는 사실 정통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당시 부정으로 썩어빠진 정부와 군부에 대한 반감이 그를 좌익들과 어울리게 한 것이다. 이러던 중 14연대가 주도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고 대대적인 군부내 좌익 숙군작업이 벌어져 박정희는 체포된다. 특무대 김창룡이 주도하는 숙군사업에서 박정희는 제 1선의 총살감이였다. 갖은 고문과 회유 속에 시달리던 박정희의 머릿속에 불현 듯 이런 생각이 스치게 된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중도에 이렇게 허망하게 주저앉으려고 그 고된 사관학교를 세 번씩이나 졸업한게 아니다! 어떡하든 살아남아 내이름 석자를 세상에 남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돌아가신 상희형님께 보답을 하는 길이다. 배신자가 되는 것은 괴롭지만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만주에 있을 때 신경거리에서 만난 관상쟁이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가? ‘治天下之 大大頭領’ 이라 하지 않았던가! 괴롭더라도 살아남아 세상을 다스리는 큰 인물이 되어야한다. 한번 비겁해져서 큰 뜻을 이루자!” 이런 생각을 하고나서 박정희는 조직계보를 꼼꼼히 작성하여 제출하고 만다. 수사진들도 보고서를 올릴 때 ‘이 사람은 공산당으로 볼 때는 반역자이지만, 우리 국가로 볼 때는 이 사람의 협조로 빨리 알맹이를 뽑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피의자보다 선처해 주기를 바랍니다’ 라는 의견서를 첨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장교의 수가 150명, 총 4천 749명의 장병이 총살, 유기형, 파면을 받게 되었다. 


이사건 수사의 총책임자였던 백선엽 정보국장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비겁하게 아부하거나 비는 비열함이 없이 의연하게 불쑥 “국장님께서 저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고 당당히 말하자 백선엽은 무심결에 대답하였다 한다. “도와 드리지요” 훗날 백선엽이 증언하기를 ‘비굴하지 않은 박정희의 의연한 자세에 감동되어 나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나왔다’고 했다.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며 이렇게 저렇게 폭넓게 얽힌 인연의 덕을 본 면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아직 죽을 운이 아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벼랑에 몰려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행운이 왔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운명)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삶을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느끼게 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 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숙군과정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살아났고, 그 후 군사혁명을 추진하면서도 여러 번 미 CIA 와 군 정보당국에 노출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지만 천우신조로(또는 운명이 정해진 대로) 체포를 면하였고, 드디어 5.16군사혁명에 성공하여 治天下之 大頭領이 된다. 목숨을 건 군사혁명을 일으키며 박정희는 여러 차례 만주 신경거리의 관상쟁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 할 때는 평소에 잊어버렸던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생각나는 법이다. 좌익을 배신하고 목숨을 구하려할 때도 그 관상쟁이의 말이 자기의 배신에 대한 합리성을 주었을 것이고, 목숨 걸고 혁명을 할 때도 그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지하였을 것이다. 아주작은 말 한마디가 한사람의 인생을 나라의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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