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치열한 삶, 느긋한 삶

2022.03.18

  




         치열한 삶, 느긋한 삶 


 주위로 부터 성공했다고,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표본이라고, 인정을 받는 황사장님은 요즈음 매우 우울하다. 자신이 이룬 성공도 다 부질없다고 느낀다. 황사장님은 미국에 이민 오신지 30년이 넘는 올드타이머 이시다. 삼십대 초반에 달랑 50불 쥐고 건너온 이민이었다. 처음 와서 접시 닦기부터 시작하여 주유소 주유원, 태권도 사범, 옷가게 점원, 봉제공장 등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고학을 했다. 대학졸업 후 법대에 진학하였고 법대졸업 후 미국 회계 관련기업에 취직하여 부사장까지 올랐다. 40대 중반에 회사를 퇴직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자기사업을 시작한다. 변호사 면허가 있지만 처음 시작한 사업은 엉뚱하게도 컴퓨터 관련사업이었고 여기서 성공을 거두자 곧바로 무선전화기 사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위인이 원체 고지식하고 성실하여 365일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성공을 위해 일에 매진했다. 드디어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여 재산이 수천만불대에 이르는 빌리니어가 되었다. 꽤나 규모가 큰 방계회사만 해도 여럿인 명실상부한 회장님이 되었지만 지금의 황사장님에겐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놈 때문이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룬 성공이지만 자식교육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늘 골골했다. 엄마가 들쳐 업고 병원에 뛰어가기 일쑤였고 911을 불러 응급실로 실려간 것만도 여러 차례였다. 어릴 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침대에서 거꾸로 떨어져 그 때 받은 충격으로 가끔 경끼를 했다. 기관지도 약해 늘 기침을 하고 무엇을 먹으면 소화시키지 못하고 체하거나 토하기 일쑤였는데 조금 커서 주니어 하이에 진학하자 증세가 가라앉고 나은 듯해서 한숨을 돌렸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이가 병세는 좋아졌으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부모와 함께 자리하기를 매우 싫어하며 자기 방을 꼭 걸어 잠근 채 엄마 아빠하고는 말도 섞기 싫어했고 매우 우울해 하다가 갑자기 광폭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이 증세는 더 심해졌고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가자 집에 발길을 끊었다. 부모가 찾아가도 피하기만 했다. 하나뿐인 자식이 부모보기를 원수대하 듯 하고 만나주지도 않으니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 황당하고 괴씸했지만 속수무책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은 이미 마약에 깊이 빠져 있었고 또 동성애자였다. 처음 명문대인 버클리에 진학하게 되어 뛸 듯이 기뻐했으나 나중에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가 동성애자 천국이라 해서 찜찜했는데 이런 사단이 나고만 것이었다. 아들의 병증이 완화되는 듯 했던 것이 진짜 병세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마약 때문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황사장님은 가끔 필자를 찾아와 아들의 운세에 대해 문의하곤 하셨는데 항시 돌아가는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황사장님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반해 가진 것 쥐뿔도 없는 오선생은 요즈음 의기양양하다. 황사장님과 비슷한 시기에 이민 오신 오선생은 연배도 비슷하신데 배움이 없으신 분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겨우 졸업하고 노동일을 했었는데 예전에 주한미군 따라 미국에 건너간 누이가 손을 써서 운 좋게도 미국에 오게 되셨다. 미국에 와서 보니 매형은 미군 제대 후 마약에 쩔어 사는 백수건달 흑인이었다. 흑인 동네에서 처음 시작한 일이 생선 튀겨 파는 일이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생선 가게에서 죽어라 생선을 튀겨도 손에 쥐는 돈은 쥐꼬리 같은 푼돈이었다. 때려치우고 빈둥거리다 한인 타운에 나와 놀다 한 여자를 만났는데 미용사였다. 


오선생과는 다르게 꽤나 부지런한 여자여서 야물게 살림을 잘 꾸려나갔다. 수입도 괜찮아서 오선생은 놀면서 가게 문이나 열어주고 닫아주는 셔터맨이 되었다. 일하는 부인 대신 아이들 등교시키고 집안 청소 대강 한 뒤 슬슬 놀다가 시간이 되면 애들 하교시켜서 학원에 데려다 준 다음 가게에 가서 문 닫아 주고 부인과 함께 애들 데리러 학원에 간 뒤 온 식구가 집에 돌아와 저녁 먹고 자는 생활을 십 몇 년 하니 애들이 커서 대학에 갔다. 부인이 하는 미용실은 수입이 좋았지만 부인 혼자 벌어 생활비 쓰고 애들 학비 부담하다보니 저축까지 할 수 있는 돈은 없었다.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여유가 있지는 않은 생활이었다. 다행히도 남매는 별 말썽없이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라 주었고 더욱 다행히도 돌대가리인 아빠머리 닮지 않고 영악한 엄마머리를 닮아 똑똑해서 공부도 꽤나 잘했다. 


아들은 의사가 되었고 딸은 MBA 졸업 후 세계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게 되었다. 의사인 아들도 수입이 꽤나 높았지만 딸은 그 열배쯤 월급을 받는 것 같았다. 오선생 내외분의 일과는 지금 현재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거의 없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서 떠났다는 것 외에는! 아직 집도 사지 못했다. 그런데 욕심도 없다. “이제 와서 다 늙어서 집이 왜 필요하데요? 젊어서도 없던 집을 구태어 이제 와서 살 필요가 뭐있어요? 친구들보니까 있던 집도 이제는 다 정리하더만!” 라고 하셨다 참으로 인생 둥글고 둥글게 흐르는 대로 사는 양반이시다. 편안하게 한가하게 산 평생이다. 


부부간에 갈등도 평생 한 번 없었다. 언젠가 오선생님 부인 왈 “저 양반은 돈 버는 재주가 태생적으로 없는 사람이예요. 욕심도 없고 성격도 게을러서 돈 못 벌어요. 그래도 다행이지 뭐예요? 내가 기술이 있으니 저 양반은 내 뒷바라지만 하며 살면 되지요. 뭐 어때요?” 내외가 둘 다 욕심 없이 느긋한 양반이다. 대외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황사장님의 인생과 배운것 없고 가진것 쥐뿔도 없는 오선생의 인생을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성공을 위해 온 몸이 부서져라 잠까지 아껴가며 365일 노심초사 하다 드디어 이룬 성공과 욕심 없이 빈둥거리며 슬슬 한가로이 신선놀음 하듯 살아온 인생, 이래서 각자의 인생은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어찌 보면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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