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는 감옥살이
오래 전 신문기사에 보니 전 세계 감옥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의 숫자에 대해 나라별로 통계가 나와 있었다. 죄수의 숫자에 있어 단연 미국이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수의 한국인이 이민한 나라이니 이는 당연하다 싶었는데 미국의 뒤를 이어 중국과 필리핀이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필자에게도 가끔 감옥에서 편지가 온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이 어떻게 필자의 연락처를 알고 연락을 해오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신문을 미국 감옥 내에서도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웠다. 신문에 나와 있는 필자의 칼럼을 보고 절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문의코저 하는 그 심정들이 안타까웠다.
긴긴 세월 감옥에 갇혀 있으나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면 받고 누구하나 면회 오는 사람도 없으니 필자에게 대신 보낼 사람도 없어 편지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묻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사연을 읽어보면 이들 주장대로라면 정말 너무도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제대로 살 수 없어 억울하게 중형을 받은 이나 변호사의 무성의로 오히려 죄가 더 커져 과도하게 억울한 형을 받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미국은 정말 법이 엄한 나라라고 느껴졌다. 10년, 20년형은 50년 60년씩 형을 받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단기수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살인을 해도 초범이고 과실치사로 인정될 경우(홧김에 살인은 했지만 살인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할 경우) 3년에서 5년 정도의 형만 살면 그만일 정도로 처벌이 약한데 미국의 경우 이런 케이스는 20~40년형이 대부분이라고 한 법률 전문가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예전에 필자에게 편지를 보낸 K군은 정말 억울한 경우에 해당된다 보여졌다. 사연은 이렇다. K군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오게 된다. K군의 어머니가 주위에 과도하게 빚을 져서 빚 독촉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도망치듯 건너온 도피성 이민이었다. 부랴부랴 건너오다 보니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칠 수도 없어 방문비자가 만료되어 온가족은 당연한 수순으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K군의 아버지는 한국굴지의 기업인 현대자동차의 생산직 사원이었다. 직장이 안정되어 있고 급여수준도 높아서 1급 직장이었는데 잘난 마누라 덕에 이런 아까운 직장도 때려 치고 미국에 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K군의 엄마는 전업주부로서 그야말로 ‘팔자 편한 여편네’였다. 성실한 남편이 열심히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만 꾸려나가면 아무 일 없었을텐데 신상이 편하니 슬슬 딴생각이 들어 친구들과 어울려 고스톱 판을 전전하다 일명 라인계라 불리는 사기 도박꾼들에게 걸려 집까지 다 날리고 주변 식구들 일가친척, 지인 등 여기저기 에 연 걸리듯 빚을 지게 되었다. 다 노름밑천으로 들어간 거였다. 결국 외아들이 K군과 함께 세 식구가 야반도주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와서 K군의 아빠는 플러밍을 하던 황씨 아저씨를 따라 다니며 보조로서 일을 도왔고 워낙 성실하고 손재주가 있어 얼마 안있어 독립할 수 있었다.
365일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니 손님들이 평판이 좋았고 꼼꼼하게 실비로 공사를 해주니 입소문이 나서 소개소개로 일이 줄을 이었다. 처음 한 달에 2~3천불 정도의 수입이었는데 1년쯤 지나자 5천불이상 벌 수 있었고, 5년 정도가 지나자 월 만불에 육박하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신분문제가 있었지만 생활은 금방 안정되었다. 이때 또 K군 엄마의 병증이 슬슬 시작된다. K군 아빠는 처음 미국에 와서 부인에게 “한국에서 그만치 사단을 겪었으니 이제 제발 다시는 엉뚱한 일 생각 하지 말고 우리 K만 잘 키워줘! 돈은 내가 벌 테니까 당신은 일도 하지 말고 무조건 K만 잘 돌봐줘! 성실하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거야!” 라는 말로 부인에게 부탁 겸 다짐을 했었다.
허나 ‘안에서 샌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 K군 엄마는 정신을 못 차리고 슬슬 카지노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한가한 여편네들과 제 주제도 모르고 어울리더니 노름여행에 바빴다. K군 아빠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어도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아이는 팽개쳐 둔 채 노름에 빠져있는 K군 엄마의 실상을 아빠는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저도 인간인데 또 그런 짓을 할까?’ 싶었을 것이다. 방치된 K군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아빠는 죽어라 돈 벌고, 엄마는 미친년처럼 죽어라 돈 갖다 버리고, K군은 나쁜 애들과 죽어라 놀아났다. 어느 날인가 이 사실을 안 K군 아빠는 엄마와 대판 싸움을 벌린 뒤, 삶의 의욕을 잃고 처자식을 놔 둔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당장 살길이 막막해진 K군 엄마는 변두리 주점에 나가 웃음을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이런 가정 환경 속에 K군은 점점 삐뚤어져 갔다. 이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상대방 불량배들과 시비가 있을것 같으니 Back-up(뒤에서 응원하는 것, 과시하는 것)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타운의 한 cafe 였는데 가서보니 친구와 어떤 아이가 서로 욕을 주고받으며 다투고 있었다 한다. 가게 문을 막 들어서고 얼마 안있을 때 갑자기 ‘탁’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먼저와 있던 안면 있는 친구들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휩쓸려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뛰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어떤 친구가(경황이 없어 그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한다) 자신에게 뭔가를 내밀며 가지고 있으라고 다급히 이야기해서 정신없이 받아들고 뛰었는데 나중에 보니 총이었다 한다.
K군이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여럿 나왔고 어찌된 영문인지 친구들도 입을 맞춘 양 한결같이 K군이 총을 쏘았다고 주장하며 K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는데 기가 막힌 것은 피해자들(총을 맞고 죽은 아이와 같은 패거리)도 한결같이 K군이 총을 쏘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K군은 영락없이 1급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돈이 없으니 당연히 변호사도 살 수 없었고 그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어마어마한 형량을 받고 중범죄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한다. 사건이후 엄마 얼굴은 딱 한번 보았으며 10년이 넘도록 면회 와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호소하였다. 필자는 차마 K군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K군이 너무 가엾고 현실이 너무 깜깜해서였다. 이후 간혹 가다 감옥에서 오는 편지를 받게되었지만 일절 답장을 하지 않았다. K군과의 형평성이 생각들었기 때문이다. 이글을 통해 편지를 보내준 분들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해본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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