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unkwak님의 다른글 더 보기 :: 총 260
목록 닫기목록닫기 목록 열기목록열기
세계여행

헤르만 헤세의 고향, 칼브(독일)

2018.05.04




헤세의 고향, 칼브

Calw
 

 

 

독일의 칼브와 스위스의 몬테뇰라를 여행했다.

 

 

 

 

이곳을 여행한 목적은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를 찾아 그의 행적을 찾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헤세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튀빙겐, 바젤, 베른, 가이엔호펜, 취리히, 인도, 스리랑카 등이 있지만

칼브는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곳이고 몬타뇰라는 그가 말년을 보낸 후 생을 마감한 곳이다.

 

 

 

 

칼브는 소박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목조 가옥들이 줄지어 서있는 작은마을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닌다면 1시간이면 마을 전체를 모두 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헤세가 태어난 집, 왼쪽 문 옆으로 헤르만 헤세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명과 헤세의 동판이 있다  

 

그러나 헤세의 고향집, 헤세 박물관, 산책로, 니콜라우스 다리 등 볼 것이 많아 반나절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1990년 문을 연 칼브의 헤세 박물관, 헤세가 태어난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다

 

헤세는 1877 7 2일 개신교 선교사인 부친 요하네스 헤세와 모친 군데르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는 슈바벤 지방의 스위스계 출신인데 외할아버지는 인도 선교사 출신으로 학식(박사)이 매우 높은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케랄라 주에서 사용하는 말라알럄어와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를 읽고

구사할 수 있는 인도를 사랑한 인도어 전문가였다.

 

 

 

 

특히 말라알럄어는 문법 정리와 사전 편찬까지 하여 케랄라 주(탈라세리)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1911년 헤세가 인도를 여행한 후 산문집 인도에서와 소설 싯다르타를 발표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헤세가 4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모두 바젤로 이사를 하게 된다.

부친이 바젤에서 발간되는 선교회지의 공동발행인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1886년에 헤세 일가는 다시 칼브로 왔고 헤세는 라틴어학교인 칼브 실업학교에 입학했다.

 

 

 

 

1891(14)에는 선교사 수업을 받기 위해 마울브론 수도원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가슴 속 깊이 시인의 꿈을 가지고 있던 예리하고 영민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닌지 6개월만에 도망치다 붙잡혔으며 학교로 부터는 엄한 처벌을 받는다.

그 후유증으로 헤세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1990년 칼브의 거리 풍경, 분수대 왼쪽(화살표)으로 헤세가 태어난 집이 보인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다시 칼브로 데리고 왔다.

 

 

 

 

두 달 정도 슈테텐 정신병원에서 요양한 그는 칸슈타트 고등학교에 입학 7학년 수료 자격 시험을 치룬다.

 

 

 

 

헤세는 그 후로는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성숙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있는 것 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헤세는 이때부터 책과 늘 함께 있는 서점 점원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1895(18)부터 3년동안은 튀빙겐의 헤켄하우어(J.J. Heckenhauer) 고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 언어학, 법학 등 서적 분류하는 일을 하며 책을 열심히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썼다.

 

 

 

 

서점에서 12시간씩 일하며 공부한 책으로는 그리스 신화, 신학, 문학, 철학 등 다채로웠는데

특히 괴테, 레싱, 실러, 니체 등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남들이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시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

 

 

 

 

시집은 자비로 출간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시집에 작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 때 만난 사람이 9년 연상의 마리아 베르누이(Maria Bernoulli).

그녀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스위스에서는 최초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운영하던 여인이다.

헤세와 베르누이는 함께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으며 바젤의 예술가 모임에도 동행하여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한다.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가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바로 이시점이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여름에 가이엔호펜에 있는 빈 농가로 거주지를 옮겼다.

 

 

 

1961년, 큰아들(브루노)과 함께 알프스를 찾은 마리아 베르누이(1868-1963): 헤세보다 1년을 더 살았다

 

두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브루노(1905), 하이너(1909), 마르틴(1911) 등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녀는 교양있는 여인으로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헤세는 1911, 화가 슈투르제네거와 함께 아시아 여행길에 올라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지아 등을 여행한다.

 

 

 

 

그래서 칼브와 몬테뇰라의 헤세 박물관에는 그들이 아시아 여행길에서 구입한 불상 등 기념품과..

 

 

 

 

슈투르제네거가 그린 말레이(Malaiin) 여인의 초상화 등이 전시관에 진열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15년에는 부친의 사망, 아내의 정신분열 악화, 막내의 중병 등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결국 헤세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몬타뇰라의 카사 카무치(Casa Camuzzi)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좋아요
인기 포스팅 보기